(최종본) 과제-09 기말과제 007-25 이병현
제목: 치매와 도덕적 판단의 기준 설정: 현재 경험된 삶의 질의 우선성을 중심으로
서론
치매(dementia)가 흔한 질병이 된 초고령 사회에서, 의사결정 능력을 상실한 환자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고 다루어야 하는지는 현대 생명윤리의 주제 중 하나이다. 치매 환자의 경우, 온전한 인지 능력을 지녔던 과거에 내린 판단과, 인지 기능이 저하된 현재 시점에서 경험하는 삶의 질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평생 채식주의를 자신의 윤리적 신념으로 삼아 온 사람이, 치매 발병 후에는 고기를 맛보며 만족을 느끼고 있다고 하자. 이 경우 도덕적 판단에서 우선적으로 존중해야 하는 것이 과거의 채식주의 신념을 위해 지금의 식습관을 제한해야 하는지, 아니면 현재 환자가 경험하고 있는 행복을 보장해야 하는지가 딜레마로 작용한다.
기존 치매 윤리 논의, 특히 연명 치료나 돌봄을 결정하는 의사결정과 관련된 논쟁은 주로 자율성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한 입장은 과거의 자율성이 현재를 규범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고 보며, 인간의 삶을 하나의 서사적 흐름으로 이해한다. 이에 따르면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내린 결정은 치매 이후에도 여전히 존중되어야 하며, 사전의료지시서(advance directives)는 개인의 존엄을 보장하는 장치로 해석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치매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유지되는 잔존 능력인 가치 평가 능력(capacity to value)을 강조하며, 현재의 자율성(잔존 자율성)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입장은 모두 “누가 결정권을 갖는가”라는 자율성의 문제에 집중한다. 결과적으로 이 논쟁은 ‘과거 자아가 구성한 서사적 자율성’과 ‘현재 자아가 보여주는 경험 기반의 자율성’ 가운데 어느 것이 규범적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라는 정체성 중심의 쟁점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치매 환자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서 핵심적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떤 자율성이 우선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이 사람의 삶을 실제로 더 좋게 만드는가?”라는 근본적인 복지의 문제로 집중되어야 한다. 즉, 자율성의 우열을 따지기에 앞서, 도덕적 판단의 최종 정당화 기준이 자율성 자체인지, 아니면 삶을 좋게 만드는 복지인지를 먼저 따질 필요가 있다.
본고의 목표는 치매 환자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우선 기준이 과거의 자율성이 아니라 현재 경험되는 삶의 질로서의 복지임을 논증하는 것이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논증 구조를 따른다. [1] 먼저 도덕적 판단에서 자율성보다 복지가 더 근본적인 정당화 기준임을 밝힌다. 자율성은 독립적인 목적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좋게 만드는 복지에 기여할 때 도덕적 지위를 획득하는 도구적 가치임을 논증한다. [2] 다음으로 복지가 성립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규정한다. 복지는 외부에서 정의된 좋은 조건의 목록이나 과거의 계획만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주체가 현재 의식적으로 감각하고 평가할 수 있는 경험적 변화를 통해 확인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인다. [3] 이어 철학적 논의와 실증 연구를 종합하여, 치매 환자가 인지 기능 상실에도 불구하고 평가적 반응과 잔존 능력을 유지하는 경험적 주체임을 논증한다. 이를 통해 치매 환자가 현재의 삶의 질을 자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음을 밝힌다 [4] 그 다음 단계에서 드워킨의 이익 이원론을 중심으로 한 반론을 제시한다. 이는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설정한 삶의 장기적 방향성과 서사적 통일성이, 현재의 정서적 안락보다 상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정리된다. [5] 그러나 치매의 핵심적 특성인 심리적 연속성의 붕괴를 근거로 이런 반론을 재반박한다. 과거 자아의 가치와 계획은 현재의 주체에게 더 이상 심리적 공명이나 규범적 힘을 갖지 못하며, 치매 환자가 실제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실재(reality)는 현재의 정서적 경험이라는 점을 논증함으로써, 드워킨식 반론이 치매 상황에서는 적용력을 상실함을 보인다. [6] 마지막으로 논증들을 종합하여, 치매 환자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과거의 자율적 신념이 아니라 현재 경험되는 삶의 질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그 사회적 함의를 제시한다.
본론
도덕적 판단을 정당화하는 기준으로서의 복지
복지를 통해 도덕적 판단이 정당화되는 이유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지의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복지(well-being)는 단순히 순간적인 쾌락이나 일시적인 기분의 변화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포함하여 개인이 좋은 삶(good life)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어느 정도 충족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포괄적 개념이다. 구체적으로는 고통과 불안의 회피, 기본적 기능의 유지, 정서적 안정, 의미 있는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등, 실제로 삶을 더 좋게 만드는 요소들의 총합으로 이해될 수 있다(Griffin, 1986). 한편 도덕적 판단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어떤 요구를 할 수 있는지, 어떤 행위·규칙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규정하는 규범적 판단이다. 따라서 어떤 규칙이나 원칙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려면, 그 원칙이 적용되는 당사자들에게 그들의 삶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합리적으로 수용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정당한 도덕 원칙이 되려면 그 원칙은 관련된 당사자 누구에게도 합당한 이유로 거부될 수 없어야 한다(Scanlon, 1998). 예를 들어 “당신의 고통은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원칙은, 당사자가 “이 원칙을 따르면 내 삶은 분명 더 나빠지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에 정당한 도덕 원칙이 될 수 없다. 이처럼 개인의 고통, 불안, 삶의 악화와 같은 복지의 손상은 어떤 원칙을 거부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이유가 된다. 반대로 개인의 복지를 보호하고 개선하는 원칙은 그 규칙의 적용 대상에게 합당한 이유로 거부되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복지는 도덕적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적 정당화 기준으로 기능한다. 도덕적 판단은 결국 “누구의 삶이, 어떤 이유로, 실제로 더 나아지거나 더 나빠지는가”에 대한 평가를 수반하며, 그 평가의 중심축에 복지가 놓이는 것이다.
자율성보다 복지가 도덕적 판단에 더 적합한 이유
앞서 살펴본 정당화 조건에 비추어 볼 때, 도덕적 판단의 최종 근거는 복지와 자율성 중 무엇인지 따져 볼 수 있다. 물론 칸트의 의무론적 전통에서 자율성은 단순한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이성적 존재가 보편적 도덕 법칙을 스스로 수립하는 능력으로서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본래적 가치(intrinsic value)로 정립된다(Kant, 1785). 이 관점에 따르면 자율성은 인간 존엄의 근원적 토대이므로, 복지 증진을 위해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 그러나 칸트의 자율성 개념은 주체가 행위 준칙을 이성적으로 검토하고 입법할 수 있는 이성적 행위자(rational agent)임을 필수적인 전제로 한다(O’Neill, 2002). 문제는 이 자율성을 도덕적 판단의 기준으로 고수할 경우, 도덕적 존중의 범위가 ‘이성적 존재’로만 국한되어, 이성적 능력은 손상되었으나 여전히 고통과 안락을 감각하는 치매 환자들은 도덕적 고려 대상에서 배제된다는 점이다. 만약 자율성이 절대적 가치라면, 추상적인 이성적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정작 보호해야 할 환자의 실존적 고통을 외면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따라서 도덕적 판단이 모든 존재에게 보편적으로 정당화되려면, 고도의 이성을 요구하는 자율성보다는 존재 자체의 삶을 좋게 만드는 복지가 더 근본적인 토대가 되어야 한다. 즉, 인지적 취약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자율성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절대적 권리가 아니라, 개인이 안녕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도구적 가치(instrumental value)로 정립되어야 한다. 실제로 현대의료윤리에서 자율성을 강조하는 실질적인 이유 역시, 그것이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여 주관적 만족감이나 욕구 충족과 같은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Raz, 1986). 결국 가치의 논리적 위계에서 복지는 도덕적 판단의 ‘목적’에 해당하며, 자율성은 그 목적에 봉사할 때 비로소 도덕적 의미를 획득하는 ‘수단’의 위치에 놓인다. 수단이 목적에 우선할 수 없다는 논리적 필연성에 따라, 도덕적 판단의 최우선 기준은 자율성이 아닌 복지가 되어야 한다.
복지는 오직 현재 자각하고 있는 삶의 질에 근거한다
경험적 복지의 개념
복지가 도덕적 판단의 최종 기준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다음 질문은 “복지가 어떻게 성립하는가”이다. 여기서 복지가 ‘성립한다’는 것은 단순히 외부에서 보기에 좋다고 판단되는 조건이 갖추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의 주관적·심리적 상태가 실제로 변화하여 그에게 삶이 더 좋게 느껴지고 평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복지는 추상적인 좋은 조건의 목록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실제로 차이를 만들어내는 좋음(good for someone)이어야 한다(Sumner, 1996). 따라서 어떤 조건이 복지에 기여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그 조건이 단지 외부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조건이 주체의 내면적 반응 속으로 들어와 그 사람의 기분, 정서 등에 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가 그 사람에 의해 긍정적으로 인식 및 수용되어야 한다. 외부에서 아무리 인상적인 성취나 조건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당사자에게 아무런 감정적·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 조건은 그 사람의 삶과 분리된 낯선 사건에 불과하다(Railton, 1984). 복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고차원의 복잡한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 기쁨, 고통과 같은 직접적인 경험, 혹은 그에 대한 평가적 수용이다. 복지는 이런 경험적, 정서적 변화를 통해서만 주체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린다. 이 점은 네이글이 제시한 기만당한 남자(the deceived man) 사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어떤 남자가 아내와 동료들로부터 평생 배신당했지만,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오히려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고 믿으며 만족 속에 생을 마감했다(Nagel, 1970). 객관적 사실의 측면에서 그는 분명히 배신당했다. 하지만 이 사실은 그의 의식 속에 결코 들어오지 않았으며, 그에게 어떤 고통도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의 실제 경험은 끝까지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 만족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경험적 관점에서 그의 복지는 훼손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인지되거나 경험되지 않은 외부 사실은 그 사람의 복지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개인의 복지가 성립하는 기준은 외부 세계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그 사실이 주체에게 어떤 정서적·심리적 변화를 만들어내고, 그 변화가 실제로 인식 및 평가되었는가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복지는 본질적으로 경험에 기반한 가치이며, “어느 시점의 경험이 복지를 구성하는가”라는 시간적 문제로 이어진다.
경험적 복지의 현재성
시간적 측면에서 복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현재 의식적으로 자각 가능한 경험적 상태에 있어야 한다. 여기서 “현재 경험”이란 한순간의 찰나적 느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의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정서 및 감각 상태의 시간적 폭 전체(몇 분, 몇 시간, 때로는 며칠에 걸친 정서 상태)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과거의 경험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더 이상 현재의 삶에 직접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물론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성격과 습관, 관계에 영향을 미쳐 현재의 복지를 매개하는 경우는 있지만, 이때 복지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현재의 정서와 평가 상태이다. 반대로 미래의 경험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추정일 뿐이며, 이에 대한 예측은 오류 가능성이 있다. 복지는 삶이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개념이므로, 존재하지 않는 경험(미래)이나 이미 지나간 경험(과거)은 그 자체로 현재의 복지를 구성할 수 없다. 구체적으로, 과거의 선호나 계획은 당시의 자신이 “미래에 무엇을 느낄 것인가”를 예상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의사결정 순간에 우리가 기대하는 효용과 실제 경험에서 얻는 효용은 다를 수 있다(Kahneman, 1997). 일례로, 과거에 간절히 원했던 일자리였지만 일을 시작하고 난 뒤, 현재 삶이 불만족, 스트레스 같은 부정적 정서로 찰 수 있다. 이때 과거의 선호를 근거로 현재의 고통을 계속 감수하는 것은 복지의 관점에서 부적합한 선택이다. 복지가 “실제로 삶이 잘 되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지표라면, 예측 실패 가능성이 큰 과거의 기대보다 지금 당장 경험되고 있는 정서 상태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경험 기반 복지 개념을 전제로 할 때, 과거의 선호는 그 자체로는 현재 복지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설령 과거의 선호가 현재의 만족과 일치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이 가치 있는 이유는 과거에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긍정적인 경험을 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과거의 결정은 단지 현재의 행복을 위한 참고 자료일 뿐이며, 도덕적 판단의 유일한 승인 권한은 ‘지금 자각되는 삶의 질’에 있다.
치매 환자는 현재 삶의 질을 자각하는 경험적 주체이다
인지 기능 상실과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가치 평가 능력
치매 환자의 도덕적 지위를 논하기 위해서 인간의 반응 능력을 층위별로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반응은 단순히 뜨거운 것을 피하는 생물학적 반사와, 합리적 추론을 통해 삶을 설계하는 고차원적 의사결정으로만 구분되지 않는다. 이 둘 사이에는 고차원적 인지 능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단순 반사를 넘어서는 제3의 영역인 평가적 반응(evaluative response)이 존재한다(Jaworska, 1999). 평가적 반응의 핵심은 기억이나 논리적 사고 같은 인지 기능과는 별개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이는 복잡한 미래 계획이나 과거의 정보 없이도, 특정 대상이나 환경이 현재 자신에게 유익한지 유해한지를 감각적으로 판단하고 이에 대해 뚜렷한 정서적 선호를 보이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치매 환자가 자신을 돌보는 사람에게 구체적인 친밀감을 느끼거나 특정 환경에서 안정감을 감각하는 것은 과거를 기억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상호작용 속에서 ‘좋음’을 즉각적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치매는 이성적 추론 능력은 손상시키지만, 주체의 경험적 삶의 질을 구성하는 이 독립적인 평가 능력까지 소멸시키지 않는다. 이처럼 인지와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평가 능력은 인지적 자아가 해체된 이후에도 환자에게 보존되는 정서적·관계적 차원의 ‘잔존 능력(remaining capacities)’에 해당한다(Post, 2000). 이 잔존 능력은 단순히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기능이 아니라, 환자가 현재의 삶을 감각하고 향유하게 만드는 경험적 복지의 토대이다. 따라서 인지 능력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환자는 여전히 가치 평가를 수행하는 주체이며, 이 능력은 자율성에 의존하지 않고도 도덕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치매 환자의 정서적 경험의 귀납적 실재성
치매 환자가 현재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자각하고 있다는 결론은, 인지적 기억이 소실된 이후에도 정서적 경험이 독립적으로 유지된다는 다양한 영역의 실증 연구들을 통해 귀납적으로 지지된다. 이 연구들은 시각, 청각, 대인관계 등 서로 다른 경험 영역에서도 공통적으로 확인됨으로써, 정서적 잔존 능력이 특정 상황에 국한된 예외가 아니라 치매 환자의 보편적 특성임을 보여준다. 시각적·정서적 자극에 관한 연구에서 치매 환자에게 슬픈 영화와 즐거운 영화 장면을 보여준 결과, 대부분의 환자는 장면의 내용이나 줄거리에 관한 기억(사실)을 수 분 내에 잊어버렸다. 그러나 영화가 유발한 슬픔이나 행복과 같은 정서 상태는 기억의 소실 이후에도 상당 기간 잔존하였다(Guzmán-Vélez et al., 2014). 이는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인지적 원인)은 소멸하더라도, 그로 인한 정서적 상태는 여전히 환자의 내면에 생생하게 실재함을 입증한다. 청각 및 예술적 자극을 다룬 연구들 역시 동일한 패턴을 확인한다. 언어 능력을 거의 잃은 중증 치매 환자들도 음악이나 미술 활동 중에 뚜렷한 즐거움·안정·몰입을 보이며, 과거의 기억이 없어도 익숙한 멜로디나 예술적 자극에 대해 즉각적이고 분명한 정서적 반응을 나타낸다(Cuddy & Duffin, 2005). 이는 인지적 회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현재의 미적·정서적 경험이 삶의 질을 형성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관계적 측면에서도, 환자는 가족의 방문 사실 자체는 곧바로 잊더라도 방문 직후 형성된 심리적 안정감이나 친밀감은 그대로 유지한다. 반대로 의료적 처치에서 불쾌한 감각 자극을 받았을 때, 사건의 구체적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해당 의료진에 대한 거부감이 정서적 잔여(residue)로 남아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Sabat, 2002). 이처럼 시각, 청각, 관계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입증된 정서적 반응의 실재성은, 이것이 단순한 생물학적 반사가 아니라 외부 자극에 의한 삶의 질적 변화를 주체적으로 체감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즉, 환자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인과관계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현재 감각하는 정서 그 자체만으로도 환자의 복지를 구성하기에 충분하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인지가 사라져도 경험은 남으며, 이 경험이 환자의 행복과 불행을 직접적으로 구성한다는 귀납적 도출이 가능하다. 이는 치매 환자가 여전히 현재의 삶을 감각하고 영위하는 경험적 주체임을 뒷받침하는 실증적 근거가 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도덕적 판단의 근거가 자율성의 형식적 보존이 아니라 복지의 증진에 있음을 밝혔다. 이후 복지는 오직 현재 경험되는 삶의 질을 통해 구성된다는 점을 논증하였다. 이어 치매 환자는 인지적 기억 상실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삶을 형성하는 정서적 경험을 분명히 감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였다. 이 세 전제가 결합되면, 치매 환자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논리적으로 “현재 경험되는 삶의 질”로 귀결된다.
현재 경험이 복지 판단의 유일한 근거가 아니라는 반론
본 논문은 앞선 전제를 통해 복지를 “현재 경험되고 자각되는 삶의 질”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드워킨이 제시한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규정은 인간 삶을 좋게 만드는 요소를 경험 중심적으로 축소하여, 인간 삶의 구조적 가치와 장기적 방향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드워킨은 삶을 진정으로 좋게 만드는 요소를 규명하기 위해 이익을 경험적 이익(experiential interests)과 비판적 이익(critical interests)으로 구분한다.
“우리 모두는 경험적 이익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소프트볼을 하거나, (…)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무언가에 열심히 몰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일을 하는 경험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 비판적 이익이라고 부르는 것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충족시킨다면 삶을 진정으로 더 좋게 만드는 이익이며, (…) 우리가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목표들을 대변한다. (…) 단지 우리가 우연히 그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만약 그것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 삶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Dworkin, 1993, pp. 201–202)
이러한 비판적 이익의 관점에서 본 논문의 입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반박될 수 있다. 첫째, 경험되지 않은 사실도 삶의 목표를 좌절시킴으로써 복지를 악화시킬 수 있다. 이는 네이글의 “기만당한 남자” 사례에 대한 본 논문의 해석이 복지의 본질을 오독했다고 지적 가능하다. 본 논문은 배신이라는 사실이 주체의 의식에 들어오지 않아 고통을 유발하지 않는다면 그의 복지는 훼손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기만당한 남자가 진정으로 추구했던 것은 ‘행복한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받는 관계’라는 삶의 가치였다. 배신이라는 객관적 사실은 그가 이루고자 했던 가치를 무너뜨렸으며, 이 때문에 그의 삶은 그가 끝까지 알지 못했더라도 실제로 더 나빠진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을 복지의 필요조건으로 보는 본 논문의 전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둘째, 복지를 “현재의 경험적 상태”로 제한하는 것은 삶의 통일성을 해친다. 본 논문은 과거의 선호와 계획을 미래 감정에 대한 불확실한 예측으로 축소하고, 현재의 경험이 더 합리적인 지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거의 결정들은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존엄을 구성하는 정체성적 결단(constitutive judgment)이다. 예를 들어, “인지 능력을 잃고 의존적으로 연명하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는 결정은 미래의 고통을 계산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어떤 서사로 완성할 것인가에 대한 장기적인 자기규정이다. 치매 발병 이후 환자가 일정한 안락함을 느낀다 하더라도, 이것이 과거 자아가 설정했던 삶의 가치와 방향성을 무효화할 수는 없다. 오히려 현재의 단기적 편안함만을 기준으로 삶을 재구성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서사적 일관성을 파괴하는 객관적 해악(objective bad)이 될 수 있다.
이런 반박을 고려하면 “복지는 오직 현재 경험되는 삶의 질에 근거한다”는 전제는 삶의 서사적 구조, 장기적 가치, 정체성적 이익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불완전한 규정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경험되지 않는 사실도 복지를 해칠 수 있고, 과거의 결단은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결정이므로, 복지를 오직 현재 경험에 환원하는 본 논문의 주장은 정당화의 범위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만든다.
심리적 연속성 붕괴와 경험적 실재의 우선성을 통한 재반박
반론은 경험되지 않은 사실도 삶의 목표 구조를 파괴함으로써 복지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며 비판적 이익의 우선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치매라는 특수한 조건에서는 전제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반론이 성립하려면, 과거 자아가 구성한 장기적 가치가 현재의 주체에게 심리적으로 연결되고 규범적으로 구속력 있는 기준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삶의 서사를 뒤흔드는 객관적 사실이 현재 주체의 복지를 해칠 수 있는 연결 기제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치매는 그런 기제 자체를 붕괴시킨다.
첫째, 치매는 기억·성격·자기 인식이라는 요소를 상실하여 과거 자아와 현재 자아를 연결하는 심리적 연속성(psychological continuity)을 단절시킨다. 물론 본 논문이 앞서 입증했듯이 치매 환자에게도 정서적 반응과 같은 경험적 능력은 잔존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잔존하는 정서적 경험이 현재 시점의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일 뿐, 과거 자아가 수립한 인생의 장기적 목표나 가치 체계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서사적 능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층위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환자가 느끼는 현재의 기쁨이나 슬픔은 과거의 신념과 단절된 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감각적 실재이다. 과거의 이익이 현재의 삶을 더 좋게 혹은 나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 가치가 현재 주체의 의식 구조 속에서 최소한의 접근 가능성이나 공명(resonance)을 유지해야 한다(Parfit, 1984). 하지만 치매 환자의 경우, 현재의 정서적 경험은 살아있을지라도 과거의 가치 구조와 연결되는 심리적 다리는 무너진 상태이다. 따라서 환자의 현재 시점에 국한된 경험을 무시하고, 이미 단절된 과거의 비판적 이익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둘째, 반론에서 강조한 실재(reality)의 조건을 치매 상황에 일관되게 적용하면 결론은 정반대로 도출된다. 반론은 기만당한 남자 사례에서 실재적 성취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여기서 실재란 주체가 세계를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는 현재적 인식 구조와 연결되어 있을 때만 유의미하다. 치매 환자에게 ‘실재하는 것’은 더 이상 과거의 장기적 계획이나 추상적 목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체감되는 정서적 안정·불안·안도감과 같은 직접적 경험의 층위뿐이다(Dresser, 1995). 과거의 비판적 이익은 현재의 주체가 이해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는 외부적 요소가 되었으며, 이는 반론에서 말하는 실재적 기준의 지위를 더 이상 가질 수 없다. 오히려 치매 환자에게 실재하지 않는 과거의 가치 구조를 강요하며 현재의 생생한 경험을 배제하는 것이야말로, 반론이 경계했던 허상에 근거한 판단이 된다.
결국 경험되지 않은 사실도 복지를 해칠 수 있다는 반론은, 경험되지 않은 사실이 복지를 해치는 메커니즘 자체가 치매로 인해 제거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치매 환자에게 실재적으로 접근 가능한 가치의 층위는 오직 현재 경험뿐이며, 이는 본 논문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여전히 독자적인 판단·정서·반응의 구조를 형성한다. 따라서 도덕적 판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서사적 자아가 아니라, 현재의 주체가 실질적으로 누리는 삶의 질을 기준으로 삼아야 함이 더욱 명확하다.
결론
본 논문은 도덕적 판단의 최종 정당화 기준이 과거의 자율적 결정의 보존이 아니라 현재의 복지 증진에 있다는 점을 규명하였다. 본론의 논증을 통해 복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조건이나 과거의 계획이 아니라, 주체가 실제로 감각하고 평가할 수 있는 현재의 경험적 삶의 질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밝혔다. 이어 치매 환자는 인지적 기억을 상실했음에도 독립적인 평가적 반응 기제와 정서적 잔존 능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치매 환자가 여전히 현재의 삶을 자각하고 영위하는 경험적 주체라는 사실을 실증적·이론적으로 뒷받침한다. 이 세 가지 전제가 결합될 때, 도덕적 판단의 기준은 과거의 신념이나 서사적 계획이 아니라 현재 경험되는 삶의 질에 기초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드워킨 관점에 기초하여 과거 자아가 구성한 가치적 방향성이 여전히 현재를 규정해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으나, 본 논문은 치매가 초래하는 심리적 연속성의 붕괴를 근거로 이를 재반박하였다. 치매 환자의 경우 과거의 가치 구조는 현재의 주체에게 심리적 접근성이나 내면적 공명을 형성하지 못하므로, 복지의 구성 요건인 ‘현재 인식 가능성’을 충족하지 못한다. 반면 현재 시점에 국한된 정서적 상태와 경험적 삶의 질은 환자가 실제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실재적 기준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치매 환자의 복지는 과거의 자율적 계획이 아니라 현재의 경험적 안녕에 기초하여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이러한 결론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대리 의사결정과 같이 초고령사회에서 마주하는 윤리적 난제들에 대한 방향성을 시사한다. 특히 문서화된 과거의 선호가 모든 경우에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심리적 연속성이 구조적으로 무너진 상황에서는 현재 환자가 경험하는 고통·평안·안도감과 같은 정서적 지표가 더 직접적이고 실재적인 도덕적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본고는 구체적인 돌봄 정책이나 법적 제도의 설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치매 환자를 대하는 도덕적 태도가 과거의 형식적 선호가 아닌 현재의 실질적 경험을 향해야 한다는 점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함으로써, 향후 이루어질 제도적 논의가 기초해야 할 새로운 규범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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