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 과제-04 5-6단락 논증에세이 007-23 조수연
제목: 보편성의 역설: 보편적 기본소득이 복지국가 정당성을 잠식하는 경로
I. 서론
21세기 복지국가는 노동시장과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자동화와 디지털 전환은 전통적인 고용 기반의 사회보장 체계를 흔들고 있으며, 플랫폼 경제와 불안정 노동의 확산은 기존 복지제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촉발했다. 복지제도가 포괄해야 할 가치와 권리의 범주가 확장되어 감에 따라 복지의 사각지대에 대한 우려 역시 함께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UBI)은 행정적 단순성과 권리 보장의 보편성을 앞세워, 기존 제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정책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UBI가 기존의 복지 체제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되레 복지 체제를 위협하는 변수로 작용할 것인지가 본 논쟁의 대표적인 이론적 딜레마다. Van Parijs(2017)는 기본소득이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를 위한 핵심적인 제도임을 피력하며, 보편적인 권리로서의 소득 보장이 인간의 실질적 자유(real freedom)를 확대할 수 있음을 얘기한다. 반면, Ravallion(2020)은 UBI의 도입이 재정 부담을 일으킬 수 있으며 되레 기존 복지 체제를 잠식할 위험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본 논문은 이러한 긴장 관계 속 Ravallion와 그 외 같은 입장을 공유하는 학자들의 입장에 서서, UBI의 도입이 복지 체제의 혁신적 보완책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무조건적 현금 이전은 복지사회의 정당성을 약화하며, 따라서 기존 제도의 합리적 대안이 될 수 없다. 복지사회의 정당성은 그 수립의 목적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추구해야 할 가치에 의해 규정될 수 있으며, 학자들은 이를 ① 정의와 공정성, ② 상호 연대와 위험 분담, ③ 경제적 효율성, ④ 시민권 보장이라는 네 가지 축으로 설명한다. 본 논문은 이러한 개념적 전제를 토대로, UBI가 이들 정당성 원리를 훼손하는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필자의 논변은 기존 맞춤형 복지가 복지국가의 정당성 측면에서 더 합리적이라는 점과, 무조건적 현금 이전이 사회적 연대와 제도적 정당성을 약화해 복지 체제의 정치적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점이라는 대표적인 두 가지 논증에 토대를 둔다. 이를 보이기 위해 본론에서는 첫째, UBI가 재정 지속가능성과 경제적 효율성의 측면에서 기존 복지제도보다 비합리적임을 논증한다. 둘째, 무조건적 현금 이전이 사회적 연대와 제도적 정당성을 약화하는 경로를 제시한다. 셋째,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을 검토하고, 넷째, 합리성의 개념을 통해 그 반론의 한계를 재반박함으로써 위의 논제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II. 본론
1. UBI는 경제적 효율성과 공정성을 약화한다.
UBI는 막대한 재정 부담에도 불구하고, 빈곤층을 직접 겨냥하지 못하기에 기존의 맞춤형 복지를 얇은 지원으로 평탄화시킨다. 그리고 이는 복지사회의 정당성 측면에서 UBI는 기존의 맞춤형 복지보다 합리적이지 못함을 드러낸다. UBI의 핵심 속성은 보편성과 무조건성이다. 이때의 보편성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금액을 지급함을 의미한다. 이 두 속성은 제도의 설계 단계에서부터 예산 제약에 관한 문제를 야기한다. 새로 증가하는 비용에 반해 국가의 재원은 한정되어 있기에, 정책결정자는 이 제도의 도입 여부를 두고 두 가지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하나는 재정 중립을 유지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선 기존의 현금 급여, 이를테면 주거급여 및 기초생활보장과 같은 현물 및 서비스에 대한 지원을 대폭 축소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재정 확대인데, 이를 택하면 소득세율이나 소비세 혹은 사회 보험료 부문에서의 광범위한 증세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Ravallion(2020)는 가상의 시나리오에서 빈곤선 대비 이전 수준이 높았던 취약 집단에서 UBI의 균등 지급액으로 복지가 대체되어 순손실이 발생함을 지적한다. 이는 표적화(need-based) 제도가 가진 “깊은 지원”을 보편 지원의 “얇은 지원(thin support)로 평탄화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역효과이다. OECD(2017)의 보고서 역시 재정 중립 UBI의 도입은 수급률의 확대는 달성할 수 있어도, 빈곤 격차 축소 효과는 되려 약화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같은 재원을 투입할 때 빈곤 격차 한 단위를 줄이기에 필요한 이전지출(marginal cost of poverty gap reduction)이 UBI보다 기존의 맞춤형 급여·고용 보장에서 더 낮다는 것이 Ravallion의 핵심 주장이다. 그렇다면 대규모 증세로 충분 재원을 확보하면 문제가 해소될까? 여기서 두 번째 비효율이 발생한다. 보편 급여가 한계세율 인상과 결합하면 결국 순임금 감소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근로 시간 및 고용을 위축시키는 현상이 일어난다. 따라서 보편적 권리를 위해 조달된 재원이 다시 구조적인 역진성을 낳아, 순효과가 취약계층의 보호로 이어지지 않을 위험이 있다. UBI는 빈곤 감축의 비용 대비 효율성과 제도 전체의 보호 두께를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복지사회의 설립 기반이 되는 가치인 공정성과 경제적 효율성을 저해하는 결과를 야기할 것이다.
2. UBI는 사회적 연대와 제도 정당성을 약화하기에 비합리적이다.
복지국가의 정당성은 재분배의 총량에서 나오지 않는다. 누가, 어떤 조건에서, 왜 지원을 받는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즉 연대의 규범—가 유지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사회보험과 공공부조, 사회서비스는 이러한 원리 위에서 그 정당성을 쌓아왔다. 그렇기에 제도가 사회적 연대의 언어가 아닌 개별 현금 이전의 맥락으로만 재구성될 때, 복지국가는 장기적으로 정당성의 훼손으로 인해 시민적 지지를 잃어버리기 쉽다. 예컨데, 복지국가의 지속가능성은 중간층의 동의에 달려 있다. 중간층이 “내 세금으로 나보다 형편이 좋은 사람에게도 현금을 준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보편 급여의 자격축소·부가적 조건 부과라는 다른 선택지로 지지층이 쉽게 이동하게 된다. 이에 따라 UBI라는 제도의 지속성 뿐만 아닌 복지 체제의 지속성 역시 흔들리게 된다. 이처럼 높은 조세부담과 결합한 UBI는 중간층의 복지 사회에 관한 인식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어떤 권리를 어떤 형식으로, 얼마의 두께로 보장할 것인지를 둘러싼 사회적 합의가 무너지면 재정·효율의 차원을 넘어 ‘상호 연대와 위험 분담’이라는 정당성의 기반 역시 무너질 것이다. Standing(2017)은 더 나아가 제도적 잠식 경로를 경고한다. 재정압력이 커질 때 결국 국가는 현물·서비스가 아니라 현금을 우선적으로 축소할 것이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실질가치가 하락하면 보편급여의 정치적 효과는 상쇄된다. 이처럼 ‘모두에게 조금씩 지급한다’라는 보편성은 특정 고위험군에 배분되던 두터운 복지를 현금화·민영화 쪽으로 이동시키는 명분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기존의 전문화된 서비스 인프라가 축소되면, 재구축의 비용과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제도의 도입으로 생긴 공익을 넘어서는 피해가 발생하여 제도의 효율성이 충족되지 않는다.
3. 반론: 복지사회 정당성의 측면에서 맞춤형 복지보다 UBI가 더 합리적이다.
앞선 논증에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복지국가의 정당성은 단순한 소득 이전의 총량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상호 연대와 공동 분담의 원리가 어떻게 구현되는가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때 UBI는 기존의 선별적 복지제도보다 오히려 더 강력한 연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선별 급여는 수급 자격 심사 과정에서 낙인과 감시, 도덕적 판단을 불가피하게 동반한다. 이러한 구조는 도움받는 집단과 부담을 지는 집단을 나누어 사회적 신뢰와 상호성을 약화한다. 반면 UBI는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권리로서 지급되기 때문에, 지원이 ‘시혜’가 아니라 ‘시민권적 권리’로 작동한다. 이는 제도 운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낙인과 위화감을 제거하여 오히려 사회적 신뢰를 강화한다. 복지국가 연구에서 강조되는 ‘재분배의 역설(paradox of redistribution)’은 바로 이 지점을 뒷받침한다. 보편적 제도는 중간층을 포함한 광범위한 지지 연합을 형성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더 큰 재분배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선별 제도는 단기적으로는 자원을 취약계층에 집중시킬 수 있지만, 중간층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적 방어력이 약하다. 이에 비해 UBI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권리자로서 제도의 이해당사자가 되기 때문에, 재정 압박 속에서도 제도가 쉽게 축소되거나 해체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상호 연대와 공동 분담이라는 복지국가 정당성의 원리에서 볼 때, UBI는 기존 체제를 위협하는 제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보편적 권리로서 주어진 제도는 ‘모두가 위험을 함께 분담한다’는 직관을 강화하여 사회적 결속을 높이고, 제도의 장기적 지속가능성을 담보한다.
4. 재반박: 합리성의 개념을 고려할때, 여전히 UBI는 기존의 복지제도보다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오인한 논증이다. 합리성은 자원의 희소성 속에서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적합한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다. 복지국가의 목표가 빈곤 완화와 취약계층 보호라면, 합리적 제도는 같은 자원으로 최대한의 빈곤 감소와 보호의 두께를 달성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UBI를 찬성하는 측은 제도의 현실적 제약과 실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누진세 강화나 새로운 과세 항목 도입은 정치적·경제적으로 매우 강한 저항에 부딪히며, 탈세 문제로 인해 예상만큼의 세수를 확보하지 못한다. 결국 균등 지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존 맞춤형 급여나 서비스 삭감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 취약계층 보호의 두께를 약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반론의 핵심 근거로 내세웠던 행정 단순화와 낙인 해소의 효과 역시 총량적 비효율을 상쇄할 정도로 크지 않다. OECD(2017)의 분석이 보여주듯 UBI는 기존 체계가 제공하던 복지의 첨예성을 수취의 확장을 위해 희생시킨다. 복지의 수율이 높아지는 것과,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복지를 보장하는 것이 반드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복지국가의 목표 달성 여부에 대한 논리적 비약이 존재한다.
III. 결론
본 논문은 보편적 기본소득(UBI)이 복지국가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위협이 되는지를 검토하였다. 먼저, UBI의 보편성과 무조건성이 가져오는 막대한 재정 부담과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이 기존 맞춤형 복지를 얇은 지원으로 평탄화시켜 경제적 효율성과 공정성을 훼손할 수 있음을 논증하였다. 이어서, 무조건적 현금 이전이 사회적 연대의 규범과 제도적 정당성을 약화시켜 복지국가의 정치적 기반을 흔들 수 있다는 점을 밝혔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UBI는 낙인 해소와 권리 보장의 확대를 통해 오히려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고 장기적 재분배를 가능케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음을 검토하였다. 그러나 합리성의 개념을 적용해 보았을 때, 이러한 반론은 자원의 희소성과 제도의 현실적 제약을 간과한 이상적 주장임이 드러났다. 결국 UBI는 효율성과 정당성 모두에서 복지국가의 목표 달성에 합리적인 대안이 되기 어렵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필자의 목적이 단순히 UBI의 가능성을 전면 부정하는 것에 있지는 않다. UBI 논쟁은 복지국가가 궁극적으로 어떤 가치를 우선시해야 하는지—즉, 모두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는 보편성인가, 아니면 취약계층을 두껍게 보호하는 표적성과 연대의 원리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 본 논문은 이 딜레마 속에서 후자의 가치, 곧 필요에 기반한 깊은 보호와 사회적 연대가 더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UBI 논의의 의의는 복지국가의 설계 방향을 재검토하게 만드는 데 있으며, 이 과정에서 우리는 복지국가가 유지해야 할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새롭게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