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본) 과제-09 기말과제 007-06 박예서
제목: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간 인과관계: 단기 성장률보다 더 중요한 장기적 제도 기반
서론
오랜 세월 동안 학술적 논의에서 권위주의가 경제성장에서 우위에 있다는 가설이 반복되어 왔다. 특히 중국과 중동 산유국 등의 사례를 참고하면, 민주주의보다 결정이 신속한 권위주의가 더 성장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Barro와 같은 학자들은 정치적 자유와 성장 간의 관계를 부정하기까지 하며, 이들은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심지어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주장을 제시한다(Przeworski & Limongi 1993, p. 51). 이처럼 권위주의와 경제발전 간 관계를 긍정하는 이들의 시각은 “우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후 민주주의를 해도 늦지 않다.”라고 하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의 실증 연구들은 전혀 다른 입장을 설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들 연구는 민주주의가 단기 성장률의 등락을 넘어서 장기적인 경제발전의 토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본다. 관련 연구의 대표 학자들인 Acemoglu 등은 1960년에서 2010년까지 175개국에서 조사한 패널 자료를 분석해 민주화가 25년 동안 1인당 GDP를 약 20% 가량 증대시킨다고 주장했다(Acemoglu et al. 2019, pp. 47–48). 또한, Papaioannou와 Siourounis는 제3의 민주화 물결을 겪은 국가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민주화가 연평균 약 1%의 성장률 증대 효과를 가짐을 드러내었다(Papaioannou & Siourounis 2008, p. 1520). 권위주의 국가가 보여주는 고성장이 눈에 띌지 몰라도, 전체 표본을 장기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민주주의가 더 지속적인 성장 경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간 관계에 대한 학술적 논의는 끝나지 않았다. Doucouliagos와 Ulubasoglu은 메타분석을 통해 민주주의의 직접적 성장 효과가 미약하지만, 대신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간 간접적인 효과가 있음을 제시한다(Doucouliagos & Ulubasoglu 2008, p. 61). 이들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성장률 그 자체가 아니며, 어떤 종류의 정치체제가 제도적 조건을 잘 갖추어 경제성장의 버팀목이 될 수 있냐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에서 촉발되는 딜레마는 다음과 같다. 권위주의는 중앙에 집중된 의사결정 권한과 막대한 동원 능력을 통해 단기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보이는 반면, 민주주의는 권위주의와 달리 의사결정 속도가 느리고 이해관계가 상대적으로 분산되어 있어 단기 성장 추진력이 약한 편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장기 성장의 핵심 조건을 더 안정적으로 충족시킨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경제성장을 평가함에 있어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단기 성장률의 극대화인가? 아니면 장기적 제도 기반의 구축인가?
이러한 딜레마에 대해 본 논문은 아래 제시되는 논제를 옹호할 것이다. 아래 논제를 비롯해 앞으로 이 논문에서 정의하는 ‘장기 성장’은 최소 20년 - 25년 이상의 시계열에서 관찰되는 성장 경로를 말한다.
논제: 민주주의는 권위주의보다 법치, 정책 투명성, 재산권 보호, 포용적 제도라는 장기 성장의 제도적 기반을 더 잘 형성하며, 따라서 단기 조정비용에도 불구하고 더 우월한 경제성장 경로를 제공한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세 단계의 연역적 논증 전략을 채택했다. 우선, 유의미한 경제성장의 기준을 단기 성장률이 아닌 장기적 제도 기반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보다 이러한 제도적 조건을 더 잘 충족시킨다는 실증적, 이론적 근거를 제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가 강화하는 요소들이 성장으로 이어지는 구체적 경로를 정리하여, 민주주의가 형성하는 경제 성장의 경로가 앞서 제시한 유의미한 경제성장의 기준을 충족시킨다는 점을 논증할 것이다.
서술 순서는 위 논증의 단계를 그대로 반영하였다. 우선, 첫번째 부분에서 기존 논의를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본론의 두번째 부분에서 유의미한 경제성장의 기준을 ‘제도’로 정의하는 전제 1을 옹호할 것이다. 다음으로, 세번째 부분에서 민주주의가 이러한 기준을 더 잘 충족한다는 내용의 전제 2를 논증할 것이다. 네번째 부분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도가 어떤 구체적 메커니즘을 통해 성장을 유발하는지 전제 3을 제시할 것이다. 다섯번째 부분에서는 본 논문의 논증에 대한 예상반론과 재반박을 제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통해 논증을 정리하고, 이 글의 학문적 기여와 한계를 보여주며 마무리하려 한다.
본론
1. 정치체제와 경제성장 간 관계에 대한 기존 논쟁
권위주의 성장 우위 논지
경제발전에 있어 권위주의가 민주주의보다 우위에 있다는 논지는 크게 세 가지 직관에 기반을 둔다. 첫째, 이들은 권위주의가 부의 재분배 요구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하기에 투자를 위한 자원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투자를 늘려 성장률을 더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Przeworski와 Limongi가 이런 권위주의 우위 입장의 주장을 정리해주었다. 이들은 민주주의에서는 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이 잉여자원을 배분하라는 유권자의 압력에 굴복하는 반면, 독재자는 잉여자원의 투자를 강제함으로써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Przeworski & Limongi 1993, pp. 52–53). 둘째로, 중앙화된 권위주의적 권력이 비인기 개혁과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신속하게 밀어붙일 수 있음을 어필한다. 셋째, 동아시아 권위주의 국가들의 사례를 들어 증명한다. 이들의 입장에서 민주주의는 성장에 제약을 가하는 체제로 받아들여진다. 민주적 정치 과정은 이해집단의 분산과 정책 타협을 낳으며, 이는 단기적인 성장률을 희생시킨다. 권위주의가 성장에 있어 우위에 있다는 논지는 이러한 단기 성장 지표에 강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초기에 등장한 실증적 연구들도 이러한 민주주의 회의론과 같은 결을 보였다. Barro, Helliwell의 크로스 섹션 회귀 분석 결과, 민주주의와 성장 간 뚜렷한 양(+)의 상관관계는 없다거나, 혹은 음(-)의 관계가 나타났다(Przeworski & Limongi 1993, pp. 55–57). 하지만, 이들의 연구는 (1) 민주주의 측정의 오류, (2) 국가 고정효과와 GDP 동학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한 점, (3) 민주주의와 성장 사이의 인과 방향을 구분하지 못한 점에서 중대한 방법론적 한계를 가진 것으로 Acemoglu 등은 평가하였다(Acemoglu et al. 2019, pp. 48–49).
제도경제학과 민주주의 옹호
반면, 제도경제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정치·경제 제도의 질”이 장기 성장의 핵심 결정 요인이라는 주장을 해왔다. 17세기 영국의 의회주권 확립을 분석한 제도경제학자 North와 Weingas의 연구는 민주주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의회주권 확립 이후 국가가 재산권을 보다 신뢰성 있게 보호하였으며, 그 결과로 자본시장이 발달해 장기적 성장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Rodrik과 같은 학자들은 80여개국에서 추출된 자료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재산권 보호와 법치의 질을 나타내는 제도 지표가 다른 요인들을 압도한다고 평가한다(Rodrik et al. 2004, pp. 131–133).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직접 연결해 분석한 연구들 역시 민주주의에 우호적인 결과를 보여주었다. Gerring 등의 연구자들은 19세기 이후 시계열 자료를 분석한 결과, 민주주의 경험이 오래된 국가일수록 성장 결과가 우수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기존 논쟁은 “민주주의가 성장률을 높이는가?”라는 단순한 형태로 나타난 쟁점에서 탈피하고 있다. 대신 “어떤 정치체제가 장기 성장에 필요한 제도적 기반을 더 잘 형성하는가?”라는 보다 구조적인 질문으로 이동하고 있다. 다음 절에서는 우선 “유의미한 경제성장”의 기준을 재정의하면서 논증하고자 한다.
2. 전제 1: 유의미한 경제성장의 기준은 장기적 제도 기반이다
경제성장 평가의 기준 정의
본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경제성장을 평가하는 기준을 정의하고자 한다.
전제 1: 유의미한 경제성장이란 법치, 정책 투명성&안정성, 재산권 보호, 포용적 경제제도라는 장기 성장의 제도적 기반을 충족하는 성장이다.
여기서 ‘유의미한 성장’은 특정 정치적 가치의 실현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 논문에서의 기준은 정책·계약 환경의 예측 가능성, 충격에 대한 회복탄력성, 생산성의 지속적 개선처럼 경제적으로 관찰 가능한 성과의 성질을 가리킨다. 이러한 성질을 안정적으로 가능케 하는 제도적 조건은 법치, 정책 투명성&안정성, 재산권 보호, 포용적 경제제도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장기 성장의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단기 성장률이 잠시 높더라도, 이러한 제도적 기반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작은 충격에도 성장이 쉽게 멈출 수 있다. 반면, 단기 성장률이 일시적으로 낮더라도 이러한 제도 기반이 공고화된다면 투자가 꾸준히 이루어지면서 경제는 장기적으로 높은 소득 수준에 수렴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정의는 단순한 규범적 정의가 아니며, 본 논문에서 임의로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경제성장 이론과 실증 연구에서 반복되는 핵심 결론을 요약한 것이다. 근거로 North와 Rodrik 등의 연구를 들 수 있다. North는 제도를 ‘인간이 만든 게임의 규칙’으로 규정하였고, 장기적인 성과의 차이는 거래비용을 줄이고 재산권을 보장하는 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North 1990, pp. 3–5). 또한, Rodrik 등은 여러 제도를 묶은 지표가 1인당 소득의 격차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변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North 1990, pp. 3–5). 이러한 연구들은 다음의 세 가지 논지를 강조한다. (1) 법치와 재산권 보호: 사유재산이 정부의 임의를 통한 몰수, 국유화, 계약 파기 등에 노출되어 있다면 어떤 투자자도 투자를 감행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재산권이 보호되어야만 자본 축적이 가능하고, 여기서 나온 투자를 통해 혁신이 이루어지며 안정적인 성장이 이루어진다(North & Weingast 1989, pp. 803–806). (2) 정책의 예측 가능성 및 투명성: 경제를 포함한 국가 전분야의 정책이 자주, 예측 불능하게 바뀔 경우 투자자가 지속적으로 투자에 참여하기 어렵다. 반면, 규칙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정책은 투자 위험을 낮추어 가능성을 높이는 장점이 있다. (3) 포용적 경제제도: 포용적 제도는 다양한 사회 집단이 시장, 교육 시스템, 금융 시스템 등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인적자본과 혁신 잠재력을 극대화하게 된다. 반면, 배제적 제도는 성장의 과실을 극소수에게만 귀속시키며, 이는 정치불안과 비효율적 자원배분으로 이어진다(Acemoglu & Robinson 2012, pp. 70–75).
메타분석과 장기 데이터가 보여주는 제도 기반 경제성장 평가의 중요성
특히, 메타분석과 장기적 관점의 데이터 분석이 ‘제도 기반’ 경제성장 평가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470여개의 추정값을 수합한 Doucouliagos와 Ulubasoglu의 연구에서 인적자본, 인플레이션, 정치불안, 경제자유를 매개로 한 제도의 효과는 양(+)의 결과값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경제성장이 제도적 기반을 강화하는 통로가 마련될 경우 장기적인 경제 성장 성과가 개선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Doucouliagos & Ulubasoglu 2008, pp. 61–63).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인 Acemoglu의 연구에서는 민주화와 GDP 간 관계를 분석했다. 그 결과, 민주화는 해당 국가 경제의 25년 후 1인당 GDP를 약 20-25% 증가시키는 것으로 드러났다. Acemoglu는 그러한 효과의 매개체로서 투자 증가, 교육 확대, 경제 개혁, 공공재 제공, 사회 불안 감소 등을 지목했다. 이 연구는 경제성장의 제도적 기반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장기 성장의 핵심 결정 요인임을 재확인한다는 함의를 갖는다(Acemoglu et al. 2019, pp. 114–117). 따라서, 정치체제와 경제발전 간 관계 평가를 단기 성장률의 고저만으로 할 수 없다. 대신, 각 정치체제가 이러한 조건을 얼마나 충족시키는지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곧 민주주의–권위주의 비교의 기준을 “단기 성장률”에서 “장기 제도 기반”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이다. 이는 이후 논증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정말 중요하다. 앞서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장기적 성장 경로’는 단년도 성장률이 아니라 20–25년 이상 누적된 제도 변화와 성장 성과의 관계를 가리킨다.
3. 전제 2: 민주주의는 권위주의보다 전제 1의 조건을 더 잘 충족시킨다
전제 2: 민주주의는 권위주의보다 법치, 정책 투명성, 재산권 보호, 포용적 제도의 수준을 체계적으로 더 높인다.
민주주의가 제도 품질을 높이는 메커니즘
민주주의는 선거와 견제·균형, 다원주의를 통해 권력자의 자의적 행동을 제약하는데, 이것이 제도의 품질을 올리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다음의 세 가지 메커니즘을 통해 다양한 집단의 이해를 제도권에 흡수하여 그러한 경향이 만들어진다. (1) 선거, 책임성 및 법치: 민주주의에서 권력을 가진 자는 선거를 통해 이를 획득·유지하거나 상실한다. 이러한 권력 획득과 상실의 구조는 유권자가 임의적 몰수나 계약 파기 등의 행위에 민감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인을 형성한다. North와 Weingast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신뢰성 있는 약속’ 문제가 해결되는 지점이다(North & Weingast 1989, pp. 807–808). (2) 집단 간 커뮤니케이션 구조와 정책 안정성: 다당제 의회 체제 내에 존재하는 여러 이해집단들은 정책 생성 구조는 타협과 협상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민주적인 구조는 단기적으로 의사결정이 느리고 갈등이 첨예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단 이들이 합의해 규칙을 만들기만 하면, 안정성이 크게 올라간다. 반면 권위주의 체제에서의 정치권력 교체는 불안정하다. 이는 정책 불확실성으로 이어진다. (3) 시민 참여와 포용적 제도: 민주주의는 보통선거를 통해 하위 계층의 정치적 요구를 제도권으로 편입시킨다. 제도권으로 편입된 그들의 정치적 요구는 더 안정적으로 반영되며, 이는 교육, 보건, 사회보장 등 인적자본 형성과 관련이 깊은 공공재 지출을 늘리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실제 연구에서도 민주화 이후 인적자본·투자·무역개방·금융발전 지표가 동반 상승하는 패턴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입증된다(Papaioannou & Siourounis 2008, pp. 1535–1538).
민주주의와 제도 품질에 대한 실증 근거
이러한 메커니즘은 Gerring 등의 연구에서 실증 데이터를 통해 존재하는 것으로 입증된 바 있다. 약 100년 간 누적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민주주의의 누적 경험 기간이 길수록 법치, 재산권, 관료제의 수준이 우수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민주주의가 정치적 책임성과 공공재 제공의 강화를 통해 경제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Gerring et al. 2005, pp. 335–336). Acemoglu 또한 민주화 이후 자유선거의 도입과 더불어 행정부 견제 및 참여 확대의 개선이 이루어졌음을 조명한다. 민주주의 관련 주요 지표인 Freedom House, Polity IV, Cheibub et al., Boix et al. 등을 통합하여 분석한 결과, 민주화 이후 선거의 자유성, 집행부 견제, 참여의 포괄성이 동시적으로 개선되는 ‘민주주의 패키지’가 도입되었다는 점이 드러났다(Acemoglu et al. 2019, pp. 218–220). 즉, 민주주의는 단순한 단일 제도가 아니라, 경제성장의 기반이 되는 여러 제도들의 ‘묶음’에 가깝다. 관련하여 정치체제를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스펙트럼으로 나누는 V-Dem 지수가 중요하다. V-Dem을 분석한 Colagrossi의 연구 결과, 해당 지수를 통해 민주주의로 평가받는 국가들은 대체적으로 투자자 보호 지수, 부패인식지수, 계약 집행 지표 등에서도 높은 점수를 보였다(Colagrossi 2017, pp. 20–23). 이러한 결과는 민주주의적 제도가 법치·재산권 보호·정책 투명성과 구조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4. 전제 3: 민주주의 제도가 성장으로 이어지는 구체적 경로
전제 3: 민주주의가 발전시키는 법치·정책 투명성·재산권 보호·포용적 제도는 각각 투자 안정성, 정책 예측 가능성, 혁신 촉진, 인적자본 축적 등을 통해 장기 경제성장을 촉진하여 경제성장의 평가 기준을 충족한다.
전제2에서처럼 민주주의가 발전시키는 제도적 요소들은 매개적 결과들을 통해 장기 경제성장을 촉진한다. 이를 통해 전제1에서 정의한 경제성장의 평가 기준을 만족시킨다. 그러함으로써 최종 논제로 다가가게 된다. 그 구체적 메커니즘과 실증적 근거는 아래와 같다. 첫째, 법치와 재산권 보호가 투자와 자본축적으로 이어진다. 제도경제학계에서 “법치와 재산권 보호가 투자와 성장에 중요하다는 점”은 널리 공유되는 견해이다. 앞서 언급한 North와 Weingast의 분석에서도 같은 인식을 공유한다. 이들이 17세기 영국 국채시장의 발전 사례를 분석한 결과, 의회주권 체제 아래 투자자들이 국가 채무불이행 위험을 더 낮게 평가하였다. 즉, 의회의 권한이 강해 민주적인 국가에서 채무불이행 위험이 더 적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와 민간의 투자를 동시에 확대한 계기가 되었다(North & Weingast 1989, pp. 809–812). 이처럼 민주주의는 재산권 침해에 대한 정치적 비용을 높임으로써 재산권 보호의 신뢰성을 크게 강화한다. 둘째, 정책 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이 위험 감소와 장기 프로젝트로 이어진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예산 절차와 입법 과정이 비교적 투명하게 공개되며, 정책 변경 역시 제도화된 입법 프로세스를 거친다. 이러한 특징은 정책의 기대가능한 범위 변화를 줄임으로써 투자자가 마주칠 수 있는 정치적 위험 또한 줄인다. 앞서 언급한 Gerring 등의 연구에서도 민주주의 경험이 누적될수록 정권 교체에도 정책 기조는 크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일종의 제도화된 정책 경로가 형성되는 것이다(Gerring et al. 2005, pp. 347–349). 반면, 권위주의에서는 한번의 정권 교체가 중대한 정책 전환으로 이어진다. 이는 장기적인 인프라, R&D, 교육에 대한 투자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정책의 예측가능성과 투명성은 단기 성장률에는 즉각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장기 성장 경로의 기울기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된다. 셋째, 포용적 제도와 공공재가 인적자본·혁신·생산성을 증진하게 된다. 민주주의 체제 내 시민들은 정치적 자유를 갖는다. 따라서, 이들은 정치적 자유를 활용해 제도화된 틀 내에서 공공투자 요구를 표출한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교육 연수, 초·중등 교육 등록률, 건강 지표 등이 동반 개선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Papaioannou & Siourounis 2008, pp. 1536–1539). 앞서 나온 Acemoglu의 연구 역시 민주주의가 학교 교육 확대, 보건 지출 증대, 경제개혁과 공공재 제공을 통해 전반적인 노동 생산성을 증진시킨다고 본다(Acemoglu et al. 2019, pp. 114–118).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단기 성장률에 그치지 않고, 성장에 필요한 질적 기반인 인적자본과 생산성의 향상을 촉진하는 체제이다.
종합하자면, 민주주의는 유의미한 경제성장의 조건을 구성하는 네 요소, 법치·정책 투명성·재산권 보호·포용적 제도를 강화한다. 이 요소들은 각각 투자 안정성, 정책 예측가능성, 혁신·기업가 정신, 인적자본 축적을 매개로 하여 장기 성장에 기여한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형성하는 성장 경로는 전제 1에서 정의한 “유의미한 경제성장”의 기준을 충족한다.
예상반론과 재반박
예상반론: 권위주의 고성장 사례와 예외 문제
예상되는 반론은 아래와 같다.
중국의 고도 성장 경험이 예상 반론으로 제기될 수 있다. 중국의 경제성장을 연구한 대표 학자 Yuen Yuen Ang은 중국이 단일한 권위주의 모델이 아니라 중앙 정부는 방향을 제시하고 지방과 시장에서 실험하는 적응적 통치 방식을 통해 고성장을 이룩하였다고 본다. 애초에 ‘좋은 제도’에서 성장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최초의 약한 제도를 활용해 시장을 형성하고 점진적으로 제도적 진화를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시장이 중앙의 영도 하 정책 실험과 선택이 지방과 시장에서 이루어지면서 고도 성장을 달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권위주의 역시 일정 조건 하에서 장기 성장이 가능할 수 있다(Ang 2016, pp. 239-249). 싱가포르, 걸프 산유국 등 다른 권위주의 고성장 국가의 사례도 지적된다(Akylov 2022, pp. 6–7). 실제로 이런 사례들은 정치경제 관련 학술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케이스들이다. 이들의 경우, 권위주의도 재산권과 법치를 보장하면서 교육, 인프라, 산업정책을 통해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재반박
그러나, 위 사례는 세 가지 측면에서 반박된다. 첫째, 중국의 케이스로 볼 때 권위주의가 제도적 학습을 통해 장기성장에 적합한 기반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Ang의 주장은 결국 자기정화 없는 부패의 축적으로 성장을 저해한다는 Pei에 의해 반박된다. Pei는 Ang이 ‘적응적 통치’로 바라본 중국의 성장 메커니즘을 제도화된 정경유착(Crony Capitalism)으로 바라본다. 초기에는 성장에 친화적인 것처럼 보였던 통치 방식이 시간이 지날수록 지방과 시장에서의 부채, 비효율, 자원 오배분의 축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국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고성장 사례도 제도적 기반의 문제로 인해 장기 성장이 저해된다(Pei 2016, pp. 256-266). 둘째, 싱가포르와 걸프 산유국 같은 사례는 통계적 일반화에 있어 신중해야 하는 사례이다. Przeworski와 Limongi의 민주주의-권위주의 성장률 분포 비교 결과, 평균적으로 양 체제 간 큰 차이는 없음에도 권위주의 체제 내 성장률 분산에 훨씬 크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권위주의 체제에서 싱가포르 같은 고성장의 사례도 나타날 수 있지만, 동시에 장기 침체·파탄·내전을 겪는 국가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민주 체제에서는 권위주의보다 안정적으로 중간 이상의 성장 결과가 나타났다(Przeworski & Limongi 1993, pp. 63–65). 셋째, 싱가포르·걸프국가의 사례는 소규모 개방경제·자원부존 등과 같은 특수한 구조적 요인과 결합된 결과로, 일반화 가능한 성장 모형이라 보기 어렵다. 이들 국가를 이상화된 권위주의 모델로 삼아 보편적 정책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위험하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사례는 결과적으로 다른 권위주의 국가처럼 제도적 기반의 문제가 장기 성장의 저해로 이어지기에 민주주의와 고도성장 간 인과를 부정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또한, 다른 소수의 성공적 권위주의 국가 성장 사례를 들어 민주주의가 고도성장으로 이어지는 인과 관계를 전면 부정하는 것도 극단값에 지나치게 의존한 논법으로 바라봐야 한다.
결론
본 논문은 단기 성장률 중심의 비교에서 장기적 제도 기반 중심의 비교로 전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하여, 정치체제-경제성장을 둘러싼 기존 학술 논의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이를 위해 세 개의 연역적 전체를 통해 논제를 옹호하는 논증 구조를 구축했다. 이는 다음과 같이 드러났다. 첫째로, 유의미한 경제성장이 단기 성장률의 등락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법치, 정책 투명성·안정성, 재산권 보호, 포용적 제도라는 장기 성장의 제도적 기반을 충족하는 것이 중요함을 그동안의 제도경제학 연구들을 통해 논증하였다(Rodrik et al. 2004; North & Weingast 1989). 둘째로, 민주주의가 이러한 조건들을 체계적으로 더 잘 만족시킨다는 점을 민주주의의 누적적 경험과 제도 품질 간 상관관계(Gerring et al. 2005), 민주화 이후 공공재 투자 지표의 개선(Acemoglu et al. 2019; Papaioannou & Siourounis 2008),그리고 V-Dem 지표를 활용한 제도 품질 분석 등을 통해 나타내었다. 셋째, 민주주의가 강화하는 법치·정책 투명성·재산권 보호·포용적 제도 각각이 투자 안정성, 정책 예측가능성, 혁신·기업가 정신, 인적자본 축적이라는 구체적 경로를 거쳐 장기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점을 정리하였다. 예상반론으로 가정한 것은 권위주의임에도 고성장을 이룩한 국가의 사례이다(Ang 2016; Akylov 2022). 이러한 핵심적 예상반론의 경우 해당 사례 또한 결국 장기 성장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저해하도록 귀결된다는 점과, 권위주의 내 성장 결과 분포가 갖는 분산이 매우 크며 해당 사례들이 극단적 소수라는 점을 들어 재반박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예상 반론도 본 논문의 연역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지는 못했다(Pei 2016; Przeworski & Limongi 1993; Eberhardt 2022).
이러한 본 논증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결론: 민주주의는 권위주의보다 법치·재산권 보호·정책 안정성·포용적 제도라는 성장의 제도적 기반을 더 잘 형성하여 더 우월한 경제성장 경로를 제공할 수 있다.
우선, 이 글은 정치체제와 경제성장과의 관계에 대한 논쟁의 중심을 단기성장률의 높고 낮음이라는 관념에서 “성장에 필요한 제도적 조건의 충족인가?”라는 구조적 기준으로 옮겨 놓으려 했다. 그렇게 의도한 것은 정치체제의 경제적 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고성장 사례보다 제도의 품질, 재산권, 법치, 정책 안정성, 포용성 등 장기지표를 중심에 둬야 한다는 함의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물론 한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우선 대통령제 대 의원내각제, 다당제 대 양당제, 연동형 대 소선거구 등 민주주의 내부의 제도적 다양성이 장기적 제도 기반과 경제성장에 미치는 차별적 효과를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둘째, 최근 21세기 데이터를 사용하여 민주주의의 성장 효과가 시기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예: Narita 2021)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러한 최근의 흐름은 반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논문은 정치체제와 경제성장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단기성장률 비교가 아닌 장기적 제도기반 형성 여부를 중심으로 재구성할 필요성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학문적 공헌이 있다. 대신, 앞으로 이어질 연구에서는 확장성이 무한한 V-Dem 등의 지표를 보다 다양하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해당 지표를 활용해 특정 제도 요소가 성장에 미치는 차별적 효과를 식별할 수 있겠다. 그리고 민주주의 내부의 요소들이 어떻게 제도적 요소를 조정하는지 미시적으로 분석할 필요도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민주주의가 왜, 어떤 상황에서,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 경제성장을 촉진하는지를 보다 정교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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