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 과제-04 5-6단락 논증에세이 007-07 신주혁
제목: 알고리즘 배열이 시민 자율성을 종속시키는가?
I. 서론
연인 관계는 서로에게 막중한 책임을 요구하는 계약 관계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관계의 기반이 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자연스럽게 변하기 때문에 변심 자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상정할 수 있으며, 변심의 결과인 이별이라는 현상 자체도 불가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변심 자체가 합리적일지라도 이별의 방식에 있어 ‘일방적인 통보’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상대방과 관계를 지속하지 않겠다는 통보자(A라 하자)의 자율적인 선택은 존중되어야 마땅하지만, 일방적인 통보의 방식은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한 피통보자(B라 하자)에게 막대한 고통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연인을 배려하지 않는 행위라 지적할 수 있다. 이에 ‘일방적인 이별 통보’는 연인 관계의 핵심이 되는 자율성과 계약의 의무가 충돌하는 지점이 된다. 이에 대해 Villiger(2023)는 이별의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별(breakup)은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자율적 선택(혹은 변혁적 선택 transformative choice; Villiger)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변심에 의한 것일지라도 합리적 정당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반면, Healey(2023)는 이별 통보 자체가 연인 관계 상의 모든 의무를 곧바로 소멸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준비 없는 이별 통보는 상대방을 해친다는 점에서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본 논증문은 Healey의 논거를 반박하며 연애 계약을 지속할지에 대한 자율적 선택이 연인에 대한 의무에 앞선다고 논증한다. 본고는 묵시적 계약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연애라는 특수한 계약은 묵시적 계약으로 이별을 선언하는 시점이 아니라 결심하는 시점에 효력이 소멸한다는 논증을 뼈대로 한다. 이를 보이기 위해 본론에서는 먼저 계약을 전제로 할 때에만 의무가 성립함을 논증하고, 다음으로 연애라는 계약은 이별을 선언할 때가 아니라 결심할 때 해지됨을 설명한 후, 결론적으로 이별의 통보 행위는 계약 종료 이후에 이루어지므로 의무의 위반이 아님을 도출함으로써 논제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II. 본론
1. 계약이 성립하는 동안에만 의무가 존재한다
Healey에 따르면, 연인에 대한 의무는 ‘배려와 관심의 의무’(이하 배려의 의무)라 말할 수 있다. 논문에서 연인에 대한 의무는 ‘연인의 이익과 목표를 특별히 고려하고(partiality), 일상 속에서 배려해야 하는 의무’로 설명되며, 그는 이 의무가 이별 선언과 동시에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이 우호적으로 재조정될 때까지 잔존함을 논증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달리, 배려의 의무는 연애 종료와 동시에 소멸하며, 그가 설명하는 ‘의무의 잔존’은 ‘연인에 대한 의무’가 아닌 타인에 대한 일반적인 의무 혹은 규범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연인에 대한 의무는 타인에 대한 일반적 의무와 배타적이지는 않지만, 일반적 의무를 초월하는 적극적인 부작위나 작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연인 관계의 갑과 을을 생각해 보자. 갑은 을 이외의 성적 파트너를 가질 수 없는데, 이는 을과의 연애 계약이 제3자와의 외도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가령, 갑이 사랑한다는 표현을 잘 하지 않고 퉁명스러운 말투를 견지하는 상황에서 을이 서운함을 느낀다면, 갑에게는 애정 표현을 위해 노력할 의무가 발생한다. 반면, 연인 관계가 아닌 병이 정에게 애정의 표현을 요구한다면, 정은 이러한 터무니없는 요구에 대해 거부할 수 있다. 위의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연인에 대한 의무가 연애라는 계약관계에서 기인한 의무이며, 연애계약이 성립하지 않을 때 이와 같은 의무는 성립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 연애 계약의 종료는 이별을 선언하는 순간이 아니라 한쪽이 이별을 결심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묵시적 계약이란 계약 당사자 쌍방의 합치된 계약 존속 의사를 실제 계약 지속의 필요충분조건으로 하는 계약이라 정의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묵시적 계약을 시작하거나 종료하는 과정도 선언을 통한 합의를 요구하지 않으며, 계약 당사자가 서로에게 이행해야 할 책무들 역시 암묵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반드시 구체화되지는 않을 수 있다. 반면 계약 쌍방이 합치된 체결 의사를 가진다면 그 순간부터 계약은 시작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둘 중 어느 쪽이라도 계약을 끝내고자 하는 확실한 의사를 가지게 된다면 계약은 그 순간 끝난 것이다. 그런데, 연애관계 지속의 필요충분조건은 사랑한다는 감정의 존재이다. 예를 들어, 반드시 고백과 승낙의 명시적인 과정을 거쳐야만 연인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현실의 많은 경우에서 고백과 승낙 의사의 표시는 은유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며, 심지어는 은유적인 형태로도 합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서로의 관계를 받아들인 채 연인에게 적합한 행동들을 제공한다. 다만, 그 감정이 상호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충족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관계를 연인이라 부를 수는 없다. 연애의 종결 역시, 명시적인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잠수이별’은 이별 통보 없이 연락과 만남을 차단하는 방식의 이별을 가리키는 말인데, 선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가 서로를 더 이상 연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연애 관계가 끝난 시점은 이미 한쪽이 변심한 시점, 다시말해 더 이상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음을 자각하고 잠수를 결심한 시점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연애를 묵시적 계약이라고 말할 수 있고, 묵시적 계약의 특성에 의거하여 연애관계는 한쪽의 의사가 어긋난 시점부터 곧바로 종료된다. 다시 말해, A가 더 이상 B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계약을 소멸시키고, 계약으로부터 비롯된 ‘연인에 대한 의무’를 소멸시킨다. 위 논증에 의거하여, 이별 통보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이별 성립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단지 계약 관계가 끝났음을 상대방에게 재확인시켜 주는 선언에 불과하다.
3. 이별의 통보 행위는 계약 소멸 이후에 이루어지므로 의무의 위반이 아니다
이별의 결심에 따라 계약 관계는 자동적으로 소멸하고, 계약의 소멸에 따라 의무 역시 소멸한다. 따라서, 이별의 통보는 계약 파기 이후에 이루어지며, 의무가 소멸했으므로 연인의 의무 위반 행위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고로 이별 통보가 야기하는 고통은 부당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본론1의 사례를 빌려와 말하자면, 사랑하는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표현하지 않는 일은 잘못이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B가 A의 본심을 알게 됨으로써 고통을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양자 간의 감정이 엇갈림으로써 발생한 안타까운 일일 수는 있어도 A의 도덕적 귀책이 되지는 않는다. A의 행위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의무를 위반하며 상처를 준 일이 아니라 계약을 종언하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III. 결론
본고는 연애관계의 특징을 밝히기 위해 묵시적 계약이라는 용어를 정의하고, 묵시적 특성에 따라 연애 계약은 변심의 시점에 자동적으로 종료되기 때문에 이별의 통보가 연인에 대한 의무 위반 행위가 아님을 논증하였다. 변심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상정할 수 있고 변심을 선언하는 통보 행위 역시 의무 위반이 아니기 때문에, ‘변심에 의한 일방적 이별 통보’ 행위는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단, 본 논의는 변심이나 일방적 이별 통보를 권장한 바 없고, 단지 그것이 비난의 대상이 아님을 역설했을 뿐임에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