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본) 과제-09 기말과제 007-17 노준영
제목: 공공기관에서의 비도덕적 예술가의 작품 전시 - 박물관을 중심으로
서론
박물관은 더 이상 고립된 공간이 아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많은 박물관은 연 6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수용하는 곳도 네 군데 이상 있을 만큼 많은 이들이 문화를 누리는 공간이 되었다 (김세정 2025). 박물관은 이제 어떠한 작품을 전시할 것인지도 깊게 고민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예술가들이 다양한 비도덕적 논란에 휩싸이고 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이들의 작품을 누리는 것에 관하여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대중들의 인식은 변화됐다. 과거에는 이들 예술가의 천재성을 인정받아 계속해서 예술가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면, 최근에는 윤리적인 문제를 더 크게 보아 더 이상 가해를 정당화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현 상황과 관련된 학자들의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특히 비도덕적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행위의 옳고 그름에 관하여 학자들은 주목하였다. Archer and Matheson(2019)는 비도덕적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제시하며 반대한다. 이렇게 전시하는 행위는 예술가들의 비도덕적 행동을 묵인하거나 용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그들에게 명예가 부여되어 곧 부당한 권위를 부여하는 행위로 전락할 수 있으며,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고발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Archer and Matheson 2019, pp. 248-257). 이들의 관점으로는 비도덕적 예술가의 작품을 박물관에 전시하는 행위는 옳다고 보기 어렵다. 반면 Anderson and Dean(1998)은 도덕적 비평과 미적 비평이 개념적으로 독립되어야 한다는 온건 자율주의(Moderate Autonomism)를 옹호하며 이런 작품들의 전시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도덕적 결함은 미적 결함이 아니라는 자율성의 이론을 토대로, 관람객은 현실의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고 작품을 미적으로 즐길 능력이 있고, 악하거나 이질적인 관점을 탐구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미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덕적 타락과 미적 위대함은 양립할 수 있는 개념이다 (Anderson and Dean 1998, pp. 153-166). 이와 더불어 Matthes(2022)는 비도덕적 예술가의 작품을 아예 배제하는 캔슬 컬쳐(Cancel Culture)의 한계를 지적하며 비판적으로 참여하며 전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작품을 전시하는 행위(Displaying)와 명예를 부여하는 행위(Honoring)는 구별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소비자의 도덕적 행위 주체성(Moral Agency)을 보존하며 비판적 맥락화(Contextualization)를 통해 맥락을 제공하며 작품에 관하여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Matthes 2022, ch. 3). 이 글은 Archer and Matheson(2019)의 입장을 따르되, 박물관의 공공성과 책임을 중점적으로 연역적 논증을 전개하며, Matthes(2022)의 논리를 예상 반론에 활용하여 비판적 맥락화의 한계를 지적할 예정이다.
이 글의 핵심 목표는 비도덕적 예술가의 작품을 공공기관, 특히 박물관에 전시하는 행위는 옳지 않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연역적 논증 방식을 활용하여 박물관이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하지 않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첫 번째 전제와 박물관에 비도덕적 행위자의 작품이 전시되는 행위는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하는 행위라는 두 번째 전제를 통해 박물관은 비도덕적 행위자의 작품을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도출할 것이다. 이를 위해 [1] 첫째로 박물관은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하지 않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보인다. 박물관의 장소성을 근거로 박물관이 공공기관임을 증명한 뒤에, 공공기관이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는 논제를 통하여 박물관이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하지 않아야 할 책임을 연역적으로 논증한다. [2] 다음으로 박물관에 의한 비도덕적 행위자의 작품 전시 행위는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하는 행위임을 보인다. 비도덕적 행위를 한 행위자와 그 작가의 작품 간의 도덕적 비난을 연결할 수 있음을 증명한 뒤에, 그러한 작품을 전시하는 행위가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하는 행위임을 증명한다. [3] 한편, 두 번째 전제에 대한 예상 반론으로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옹호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Matthes(2022)가 주장한 비판적 맥락화 개념에 더하여,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는 작품을 비판적으로 전시하는 것은 작가의 명예를 높이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므로, 박물관은 비도덕적 예술가를 옹호했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4] 그러나 박물관은 적극적으로 비옹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런 부분에 있어서 중립성을 깨야 한다는 학자들의 논의를 덧붙여서 박물관의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해서는 안 될 책임을 더욱 강조하면 위와 같은 예상 반론은 해소된다. [5] 그러므로 박물관이 그러한 작품을 전시하는 행위는 박물관의 책임을 지키지 못한 행위이므로 박물관이 비도덕적 행위자의 작품을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연역적으로 논증한다. [6] 마지막으로 본 주장이 가지고 있는 함의와, 전시와 연구 보존 간의 간극을 드러내며 논증하고자 하는 범위의 오해를 해소하며 본 고를 마무리한다.
본론
박물관은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하지 않아야 할 책임이 있다
박물관의 공공성
박물관은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하지 않아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박물관의 공공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먼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d’Harnoncourt et al.(1991)은 박물관의 구분으로부터 이 논의를 출발한다. Paul DiMaggio는 박물관이 후원자 중심, 마케팅 중심, 사회적 도구의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하며, 특히 박물관의 사회적 도구의 목표에는 소외 계층에게 교육적,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인다 (d’Harnoncourt et al. 1991, pp. 45-47). 박물관은 수익 창출이라는 목표뿐만 아니라 대중 교육과 공익을 위하는 공공성을 지닌 기관의 목표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 Marilyn Perry는 박물관의 대형 기획전(blockbuster)이 예술을 엔터테인먼트로 상품화하여 관람객을 단순한 구경꾼으로 만들어버렸다고 비판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국립미술관 개관 연설을 하며 예술 작품의 사적 소유에서 공공 사용(public use)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듯이, 박물관의 공공적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d’Harnoncourt et al. 1991, pp. 51-53). Anne d’Harnoncourt는 박물관이 후원자를 위한 기관을 따로 만들어 전시를 진행하는 것은 박물관의 궁극적인 임무인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예술 작품을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고유한 경험을 제공하는 임무를 훼손한다고 지적한다 (d’Harnoncourt et al. 1991, p. 37). 많은 학자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것은 박물관은 공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물관의 목표는 단순한 상업 시설이나 엘리트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일반 대중들에게 교육적 경험과 예술적 향유를 제공하는 사회적이고 교육적인 공공기관의 기능이므로, 이러한 공공의 기능을 갖는 것이 박물관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다.
공공기관은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
공공기관은 어떠한 경우에도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해서는 안 될 막중한 윤리적 책임을 지닌다. 이는 공공기관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적 기관과 본질적으로 차별화되는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Balfour et al.(2019)의 행정악(Administrative Evil) 이론에 따르면, 조직 내의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도 모르게 거대한 악행에 가담할 수 있는 위험성이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악한 행위가 사회적으로 유익하거나 올바른 것으로 둔갑하는 도덕적 전도(Moral Inversion)가 발생할 경우, 구성원들은 자기 행동이 선한 일이라고 믿으며 죄책감 없이 악을 지속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행정악이다 (Balfour et al. 2019, ch. 1). 따라서 공공기관과 그 종사자들은 행정악의 가면에 속지 않기 위해 단순히 규정을 따르는 수동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대신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태도를 견지하여, 자신이 악행의 공범이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저항해야 할 윤리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
비도덕적 행위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악행이지만,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기술적 합리성과 결합할 때 윤리적 판단이 배제된 채 행정악의 가면 뒤로 숨기 쉬워진다. 기술적 합리성(Technical Rationality)은 과학적 분석과 기술적 진보, 그리고 효율성을 인간의 존엄성이나 도덕적 가치보다 강조하는 문화를 형성하여, 행정악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적 합리성이 윤리적 성찰보다는 절차의 효율적인 수행만을 강조함으로써, 구성원들이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도덕적 파장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Balfour et al. 2019, pp. 4-5). 그러므로 공공기관은 기술적 합리성을 핑계로 비도덕적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옹호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를 경계할 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앞서 증명하였듯이 박물관은 공공기관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정체성을 가지므로, 박물관 역시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해서는 안 될 엄중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
박물관에 의한 비도덕적 행위자의 작품 전시 행위는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하는 행위이다.
비도덕적 행위자의 작품과 작가의 도덕적 비난 연결
비도덕적 행위자인 작가가 만들어 낸 작품과 그 작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Harold(2020)에 따르면 작품이 도덕적으로 오염(Mortally Tainted)되는 것은 작품 자체가 창작자의 부도덕한 기원에 의해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Harold 2020, p. 53). 우선 그는 예술가로서의 비도덕적 행위에 관한 기준을 명시하였다. 예술가 대부분은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기에 기준이 없으면 모든 작품이 다 오염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실수나 경범죄가 아니라, 행동이 패턴을 이루고 있을 때, 타인에게 신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해를 입힐 때, 권력을 남용하여 폭력 행위를 저질렀을 때의 세 가지 비도덕적 행위의 기준을 마련하였다 (Harold 2020, p. 55). 본 논의에서는 위와 같은 Harold(2020)의 비도덕적 행위 기준에 입각하여 예술가의 비도덕적 행위를 위의 행위들로만 제한하고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비도덕적 예술가와 그의 작품 간의 관계는 다양한 학문의 관점에서 보아도 연결되어 있다. Harold(2020)는 심리학에서 활용되는 마술적 전염(Magical Contagion) 개념과 철학적 근거(Expanded Ethicism)를 활용한다. 마술적 전염은 히틀러와 같은 사악한 인물이 소유했던 물건을 가지기 꺼리듯이 악한 사람의 물건이 그 악에 의해 감염되었다는 개념이다. 이를 예술 작품에 적용하면 그 작품이 창작자의 도덕적 본질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관람객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Harold 2020, pp. 57-58). 여기에 더해 Bartel은 Berys Gaut의 윤리주의(Ethicism) 개념을 확장한 ‘확장된 윤리주의’를 추가 근거로 제시한다. 모든 예술 작품은 사회, 역사적 맥락과 작가의 가치관이 투영된 관점(point of view)을 가지기에, 작품의 관점과 작가가 의도한 태도를 관람객이 모두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전기적 정보인 사생활을 참고할 수밖에 없게 된다. (Bartel 2019, pp. 5-6; Harold 2020, p.59). Harold와 Bartel의 논리를 종합해 보면 위와 같은 비도덕적 행위를 저지른 예술가의 작품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그리고 철학적 관점에서까지 보았을 때 오염된 작품이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넘어서 관람객이 비도덕적 예술가의 작품을 보았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으로 비도덕적 행위자의 작품과 작가의 비도덕성을 연결 지을 수 있다. Carroll(1996)의 온건 도덕주의(Moderate Moralism)에 따르면, 작가의 도덕적 결함은 곧 작품의 미적(Aesthetic) 결함으로 귀결될 수 있다. 서사(Narrative) 예술에서 작가는 관람객이 자신의 도덕적 이해와 감정을 동원하여 작품의 생략된 부분을 능동적으로 채워 넣을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작가가 비도덕적인 행위자여서 도덕적인 관점을 요구할 경우, 관람객은 작품이 의도한 반응을 수용하는 데 실패한다. 이러한 잠재적 위험을 Carroll은 시한폭탄(time-bombs)과 같다고 비유한다. 즉, 작품에 투영된 비도덕적인 시각은 관객의 몰입을 저해하고 미적 경험을 훼손시키므로, 이는 단순한 도덕적 문제를 넘어 구조적인 미적 결함이 된다 (Carroll 1996, pp. 227-234). 관람객이 작품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에 이러한 작가의 도덕적 문제가 미적으로 불완전한 작품을 형성하며 혼란을 초래할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비도덕적 행위자인 작가와 그의 작품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필연적인 연결성을 가지며, 이는 작품의 온전한 감상을 저해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작가의 도덕적 결함은 단순히 창작자 개인의 사생활 영역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기원과 서사 구조 속에 깊숙하게 스며들어 관람객의 미적 몰입을 방해하는 도덕적 오염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도덕적 행위자의 작품이 만들어내는 일련의 부정적 반응들은 결국 ‘작가와 작품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이 연결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한, 해당 작품은 관람객에게 미적 경험을 제공하기보다는 도덕적 불쾌감을 주는 실패한 예술이 될 수 밖에 없다.
비도덕적 작품 전시 행위의 책임 여부
박물관에서의 비도덕적 행위자의 작품 전시는 곧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옹호로 귀결된다. 박물관은 본질적으로 공공기관의 성격을 지니므로, 박물관의 선택과 전시는 단순한 진열을 넘어 관람객에게 공적 권위와 의미를 전달하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작가나 박물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관람객에게 작품이 공적인 맥락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Archer and Matheson(2019)에 따르면, 이러한 전시는 다음 세 가지 차원에서 필연적으로 작품의 옹호 기제로 작동한다. 첫째, 전시는 관람객에게 작가의 악행에 대한 도덕적 분노 대신 예술적 성취에 대한 감탄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낸다 (Archer and Matheson 2019, p. 251). 이러한 감정의 우선순위가 뒤바뀐다면, 작가의 비도덕적 행위를 묵인하거나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그 행위를 옹호하는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둘째, 전시는 사회적 맥락을 통해 비도덕적 행위를 정당화한다. 전시가 관람객에게 공적 의미(Public Meaning)를 전달하는 과정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Archer and Matheson 2019, pp. 251-252). 박물관이 작품을 전시하며 생산된 공적 의미는 범죄나 악행이 예술적 성취를 통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다는 논리가 강화된다. 셋째, 전시는 작가를 사회적 본보기로 격상시킨다. 박물관이 예술적 성취만을 분리하여 그것을 기리려고 노력한다 해도, 전시라는 행위 자체가 작가에게 사회적 명예를 부여하며, 결과적으로 그를 존경받을 만한 인물로 보이게 만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Archer and Matheson 2019, pp. 253-255). 결론적으로, 비도덕적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는 박물관의 공공적 책임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결과이다.
박물관의 전시 행위와 옹호 책임에 관한 반론
박물관에서의 전시 행위 중 비판적 맥락화의 방법은 박물관의 옹호 책임에서 벗어나는 행위이므로 비도덕적 작품을 전시하며 옹호하지 않았다는 논증의 건전성을 공격하는 반론을 고려할 수 있다. 이러한 반론은 작품을 전시하는 것과 명예를 부여하는 행위는 별개의 행위이며, 비도덕적인 예술가의 작품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이 비판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전시는 박물관이 비도덕적 예술가를 옹호하는 행위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강조한다. Matthes(2022)는 작품의 철거 대신 예술가의 행동에 대한 설명이나 토론을 함께 명시함으로써, 관람객이 그 복잡성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비판적 맥락화를 주장하였다. 예를 들면, 고갱의 작품 옆에 생전 고갱이 저지른 성적 착취 사실을 명시하는 방식이다 (Matthes 2022, p. 93). 이러한 전시 행위는 박물관이 비도덕적 예술가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공공성의 책임 행위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박물관의 적극적 비옹호적 태도
위와 같은 비판적 맥락화의 사례는 표면적으로는 비도덕적 행위를 비판하는 듯 보이나, 본질적으로는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하는 기만적 타협책에 불과하다. 첫째, 박물관에 전시되었다는 행위 그 자체가 갖는 권위의 문제가 있다. 박물관이라는 거대한 공공기관의 공간에 작품이 전시되는 순간, 캡션을 통한 비도덕성 비판과는 무관하게 작가는 이미 제도적 승인과 명예를 얻게 된다. 둘째, 이는 엘리트 포획(Elite Capture)의 전형적 사례일 뿐이다. Matthes(2022)에 따르면, 엘리트 포획은 박물관이 자신의 기득권과 이익을 해치지 않는 안전한 범위 내에서만 도덕적 비판을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Matthes 2022, p.99). 즉, 비판적 맥락화는 박물관이 작품의 철거와 같은 실질적인 손실을 감수하는 대신, 대중의 분노를 관리하고 잠재우기 위하여 취하는 방어적 제스처에 불과하다. 이는 공익을 위한 결단이 아니라 사적 이익을 보호하려는 형태이며, 결론적으로 박물관의 공공성을 해치며 비도덕적 행위자를 옹호하는 결과가 된다.
본 논리를 더 확장하면, 박물관은 중립적인 관찰자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비도덕적인 행동을 옹호하지 않아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 박물관은 역사적으로도 단 한 번도 중립적인 공간이었던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수 없다. Evans et al.(2020)이 지적했듯, 초기 박물관의 형태인 호기심의 방(Wunderkammern)에서부터 이미 서구 중심적 시각과 특정 가치관이 투영됐다. 즉, 박물관에서 어떤 작품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행위에는 본질적으로 배제와 선택의 과정이며, 이러한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기관의 의도와 가치관이 개입되어 있다. 따라서 박물관이 주장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객관적인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며, 이를 핑계로 비도덕적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의 비도덕성을 묵인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사표시와 다름없다 (Evans et al. 2020, pp. 19-21). 따라서 현대의 박물관은 불가능한 중립성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박물관 행동주의(Activism)를 새로운 윤리적 표준으로 채택해야 한다. Rathjen(2020)의 논의처럼 현대의 활동주의적 박물관은 정치적이나 사회적 의제에 관하여 침묵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윤리적 행동을 요구하는 적극적 주체가 되어야 할 책무를 지닌다 (Rathjen 2020, pp. 8-9). 이는 비도덕적 행위자의 작품을 단순히 배제하는 소극적 조치를 넘어서, 박물관이 사회적 윤리를 선도하는 적극적인 행위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비도덕적 행위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전시 거부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공공기관인 박물관이 수행해야 할 마땅하고도 유일한 공적 의무이다.
결과적으로 박물관이 중립을 깨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공공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공공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박물관의 핵심 기능인 ‘교육’과 ‘사회적 도구’로서의 역할은 기계적 중립이 아니라 올바른 가치 지향 위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비도덕적 행위를 저지른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그 행위로 인해 고통받은 피해자와 소수자 집단을 공적 공간에서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폭력이다. 사회적 약자를 포용해야 할 공공기관이 가해자의 예술적 성취를 전시함으로써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한다면, 이는 사회적 도구의 기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박물관은 비도덕적 예술가의 명성보다 피해자의 안전과 존엄을 우선시해야 하며, 이를 위해 해당 작품의 전시를 거부하는 적극적 비옹호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야말로 박물관이 수행해야 할 마땅한 공적 의무이다.
박물관은 비도덕적 행위자의 작품을 전시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앞서 논의된 박물관의 공공성과 전시 행위의 사회적 함의라는 두 가지 전제를 종합할 때, 박물관은 비도덕적 행위자의 작품을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적 결론에 연역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박물관은 단순한 예술 향유의 공간을 넘어 사회적 공익과 윤리를 수호해야 하는 공공기관으로서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하거나 관조해서는 안 될 엄중한 책임을 진다. 여기에 더해, 작가와 작품 간의 도덕성은 서로 분리될 수 없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작품을 공적 공간에 전시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작가에게 명예를 부여하고 그들의 비도덕적 과거를 묵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박물관이 비도덕적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공공기관으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비도덕적 행위의 옹호를 범하는 행위이다. 아무리 박물관이 비판적 맥락을 덧붙여도 결국 작가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고 그들의 악행을 엘리트의 특권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박물관이 행정악의 공범이 되지 않고 자신의 공공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하여 비도덕적 행위자의 작품을 전시 공간에서 배제하는 것이 타당하며 그들이 필수적으로 행해야 할 일이다.
결론
본론에서는 박물관은 공공기관이므로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보이고, 비도덕적 행위자의 작품을 전시하는 행위는 비도덕적 행위를 옹호하는 것이다는 전제를 보이면서, 박물관이 비도덕적 행위자의 작품을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논증하였다. 구체적으로 Balfour et al.(2019)의 행정악 이론을 통해 박물관이 기술적 합리성 뒤에 숨어서 악을 방조해서는 안 될 적극적 의무를 지닌 공공기관임을 규명하였고, Archer and Matheson(2019)의 논의를 통해 전시 행위가 필연적으로 작가를 옹호하고 승인할 수 있는 기제로 작동함을 밝혔다. 이에 따라 박물관이 취할 수 있는 절충적 대안인 Matthes(2022)의 비판적 맥락화 조차 작가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엘리트 포획의 일환인 중립에 불과함을 논증하였다. 결과적으로 박물관이 공공기관으로서 행정악의 공범이 되지 않고 피해자의 존엄과 공공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작품의 물리적 전시 자체를 배제하고 중립성을 깨서 적극적인 비옹호를 보이는 방법만이 유일하고 타당한 윤리적 해법임을 확인하였다.
이 글은 예술의 표현의 자유와 윤리적 판단 사이의 오랜 딜레마를 다뤄온 기존 학계의 흐름과 같이 이어지면서도, 문제 해결의 층위를 개인적이나 기법적 차원에서 제도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으로 격상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한 학문적 차별성을 지닌다. Harold(2020)와 Matthes(2022) 등 선행 연구들은 작가의 도덕적 결함과 작품의 연결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관람객의 해석적 개입이나 캡션을 활용하는 전시 기법의 ‘수정’을 통해 딜레마를 완화하려는 접근에 불과하였다. 반면, 이 글은 이러한 기술적 처방을 완벽하지 않은 대처 방법으로 규정하고, 공공행정학의 행정악 이론을 박물관학에 접목하여 논의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넓혔다. 즉, 박물관의 비도덕적 작품 전시를 단순한 큐레이팅의 문제가 아닌, 공공기관이 악을 방조하고 정당화하는 구조적 윤리 위반의 문제로 재정의한 것이다. 이는 박물관이 더 이상 가치 중립이라는 허상 속에 숨은 소극적 관찰자가 아니라, 행정악의 공범이 되기를 거부하고 사회적 정의와 피해자의 존엄을 위해 피해자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활동가적 기관으로 거듭나야 함을 시사하며, 현대 박물관의 공공적 책임을 재정립하는 새로운 규범적 방향을 제시한다.
다만, 이 글의 전시 배제 주장이 비도덕적 행위자의 모든 흔적은 지우거나 물리적으로 삭제해야 하는 기록 말살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 글의 함축적 범위는 박물관이 수행하는 기능 중 대중을 향한 전시가 갖는 공공성을 통한 명예 부여의 권력을 박탈하는 데에 한정된다. 따라서 연구와 보존을 위한 저장의 영역과 대중에게 전시되는 영역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공공기관이 가해자의 명성을 유지하는 도구로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예술적 검열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박물관이라는 공적 공간이 비도덕적 행위의 옹호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윤리적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제도적 선언으로서 의의를 지닌다.
참고문헌
외국 문헌
Anderson, J. C., & Dean, J. (1998). Moderate autonomism. The British Journal of Aesthetics, 38(2), 150-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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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기사
김세정. (2025). “세계 4위 기록” 국중박 관람객 6백만 찍었다 [지금뉴스]. KBS.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430987&ref=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