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본) 과제-09 기말과제 007-12 한유정
제목: 치매 환자의 의사와 충돌하는 사전의료지시서의 우선성
서론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말기 환자들의 생명 연장 가능성이 증가하며, 환자의 의사결정권 보장이 의료 윤리의 핵심 과제로 부상했다. 특히 치매와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의 경우 질병 진행에 따라 환자의 인지 능력이 점진적으로 감퇴하여 의사결정 능력이 상실된다는 특수성이 있다. 이에 따라 치매에 걸리기 이전에 작성하는 사전의료지시서(advance directives)가 환자의 의사결정을 돕는 수단으로 제도화되었으나, 사전의료지시서의 내용이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담론이 생산된다. 특히 말기의 치매 환자가 보이는 의사표현이 사전의료지시서와 충돌할 경우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는 단순한 의료적 선택을 넘어 자율성의 본질과 통합적인 삶에 대한 물음을 내포한다.
알츠하이머와 같은 치매 질환으로 인해 인지 기능이 저하된 환자가 과거의 결정과 상충되는 선호를 드러낼 때 어느 시점에 내린 선택을 존중해야 하는지는 다양한 학자들에 의하여 논의되어 왔다. 특히 의사를 표현하는 시점의 차이를 다룸에 있어 자율성(autonomy)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쟁점이 존재한다. Dworkin은 자율성을 ‘진정한 선호, 자아감,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하였고, 사람이 추구할 수 있는 이익을 향유적 이익(experimental interests)과 비판적 이익(critical interest)1으로 구분하였다. Dworkin은 향유적 이익보다 비판적 이익을 추구해야한다고 역설하며, 환자가 자율성을 상실했다면 비록 현재의 자아가 생존을 원하거나 즐거움을 느끼더라도 과거의 자율적 자아가 내린 결정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Dworkin, 1993, ch. 7) Jaworska는 Dworkin의 견해를 비판하며 자율성의 핵심은 비판적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두는 능력 (capacity to value)’라고 주장한다. (Jaworska, 1999, pp. 105–138.) 예를 들어 치매 환자가 특정 이유에 가치를 둘 수 있다면 여전히 도덕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존재로 본다. Shiffrin은 ‘의지를 행사(exercise of will)’할 수 있다면 선택을 통해 경험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보고, 과거의 결정이 현재의 의지를 압도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Shiffrin, 2004, pp. 195–217) 그동안의 논의는 모두 자율성의 정의의 층위가 학자마다 달라 일관된 합의가 도출되지 못한 바 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Dworkin의 입장을 채택하되 삶의 통합성 (integrity)에 초점을 맞추어 다음을 주장한다. 말기 치매 환자의 현재 의사표현이 사전의료지시서와 충돌할 때, 연명치료와 같이 삶 전체의 구조를 결정하는 사안에서는 자율성을 수호하는 사전의료지시서의 내용이 우선시되어야한다. 이 주장은 두 가지 핵심 전제에 기반한다. 첫째, 개인은 자신의 통합적 서사에 근거한 결정 능력을 내릴 때 더 자율적이다. 둘째, 말기 상태의 치매는 통합적 관점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인 인지적 조건들을 침해한다. 따라서 치매 이후의 의사표현은 사전의료지시서보다 자율적인 결정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이러한 논증을 주장하기 위해 연역적 논증 구조를 채택하여 자율성 개념을 통합성 (integrity)을 중심으로 재구성한다. 첫째, 사람의 다양한 선택들 중 가치관에 근거하여 내리는 선택이 자율적이다. 둘째, 말기 치매의 상태는 통합적인 삶을 구성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인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위의 두 전제가 참일 경우, 사전의료지시서가 치매 이후의 의사보다 더 강한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우선성을 갖는다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이를 논증하기 위한 본론의 서술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자율성은 통합적 삶을 구성하는 능력이기에 살아가는데에 가치 판단에서 중요하게 여겨져야 함을 보인다. (2) 통합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을 때의 조건들을 검토하여 치매 환자는 통합적인 관점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임을 논증한다. (3) 통합적 삶을 설계할 수 없는 치매 환자는 자율성이 결여된 상태이라고 판단되므로 사전 의료지시서보다 선택에 있어 규범적 중요성이 낮음이 입증된다. (4) 이후 치매 환자가 가치 인식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Jaworska와 Shiffrin의 반론을 검토하고, 이를 재반박하며 논제를 정당화할 것이다.
본론
자율성과 통합적 삶의 구성 능력
자율성 개념의 일반적 이해와 한계
전통적으로 자율성은 개인이 외부의 강제나 간섭 없이 스스로를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 정의만으로는 어떠한 선택이 진정한 자율적인 선택인지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다. 본 글에서 다루는 자율성은 개인이 자신의 가치와 신념에 근거한 이유를 형성하고, 이를 시간적으로 연결하여 자신의 삶을 하나의 규범적 질서로 자기지배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자율성은 선택의 순간에만 드러나는 성질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통합적 자기 이해와 서사적 일관성을 전제한다. 순간적인 충동, 중독에서 비롯된 행동, 강한 감정적 동요 아래의 선택은 자신에 대한 통제와 이해의 부족을 드러낸다. 소설가가 순간의 기분에 따라 문장을 이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의한 세계관과 가치에 근거할 때 작품 전체의 완성도와 통일성이 높이 평가받는 것처럼, 자율성은 개인이 자신의 삶 전체의 가치와 신념을 정의하고, 이를 실천하는 능력을 발휘할 때 존중된다. 따라서 현재 시점에서 느끼는 단순한 선호를 드러내는 것보다 개인의 가치관과 신념, 믿음 등에 근거한 선택을 내릴 때 더 ‘자율적’인 선택이라고 인식된다.
자율성과 통합적인 삶의 연결
자율성은 통합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에 핵심적인 조건으로 기능한다. 인간의 삶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연속성을 기반으로 삶은 하나의 서사 (narrative)로 구성된다. 개인은 과거의 상황과 반응을 통해 경험을 체득하고, 특정한 자극이 들어오면 경험과 직관에 따라 적절한 반응을 내린다. 동시에 해당 상황을 또 다른 기억으로 재편하며 미래의 비슷한 경험에 대한 사전 지식을 형성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순간의 선택을 고립적으로 경험하기보다 이를 자신의 생애 전체 흐름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러한 서사적인 구조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특정한 방향을 지닌 연속체로 이해하도록 기여한다. 통합적 관점에서 자율성은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삶을 서사적으로 조직하고 완결성 있는 삶의 궤적을 형성하도록 한다. 이러한 자율성에 입각한 자기 형성(self-creation)의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의 성격, 가치, 헌신, 신념에 근거해 삶의 방향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간다.
‘좋은 삶’의 규범적 기준으로서의 자율성
자율성이 중요한 이유는 삶을 ‘좋은 삶’으로 성립하게 만드는 규범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잘 살기’와 구분되는 ‘좋은 삶’의 요소는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과 진정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드워킨, 2015, 644-649면) 인간의 삶은 단순히 더 많은 쾌락이나 만족을 산출하는 사건의 연쇄가 아니라, 하나의 수행(performance)으로서 평가된다. 삶이 가치 있는지 여부는 그 삶이 누구의 판단에 의해, 어떤 가치에 따라 형성되었는가에 달려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율성, 혹은 드워킨이 강조하는 진정성 (authenticity)은 개인이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기준을 타인의 판단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는 능력을 의미한다. 타인이 대신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순간, 그 삶은 더 이상 그 사람의 삶으로 평가되기 어렵다. 따라서 자율성은 단순히 복지 증진의 수단이 아니라, 삶을 나의 삶으로 성립시키는 조건이다.
이러한 이해는 드워킨 이전의 논의와도 동일한 맥락을 공유한다. 욕망이나 경향성에 따르기보다스스로 입법한 도덕 법칙에 따라 행동할 때 자율적이라고 판단되며,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삶을 단순한 목적 달성의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대우받을 자격을 갖는다. (Kant, 1785/2019, ch. 1.) 또한 자신의 기호와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때 자율성이 실현되며 (Kantian Autonomy) 통합적 가치 또한 실현될 수 있다. (드워킨, 2015, 417면) 이처럼 자율성은 개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도덕적으로 평가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며, 삶을 우연한 사건의 집합이 아니라 일관된 가치 판단의 결과로 이해하게 한다.
통합적 삶을 구성하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인 말기 치매 환자
통합적 삶의 조건
말기 치매 환자는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기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내린 선택은 치매 이전의 상태에서 내린 결정보다 규범적으로 우선한다고 보기에 어렵다. 반면에 사전의료지시서는 통합적인 삶을 반영할 수 있을 때 작성한 결과물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통합적인 삶을 구성하기 위해 충족되어야할 전제 조건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1) 과거 기억 상실, 2) 일관된 자아 의식 부재, 3) 장기적 계획 유지 불가, 4) 체계적이지 않은 욕구 표현의 상태에서는 통합적인 삶을 계획하고 설계하기에 어렵다. (Dworkin, 1993, ch. 7) 치매 환자의 권리와 이익을 고려할 때 치매 환자는 현재의 상황과 능력을 강조하여 치매 환자로,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치매에 걸린 사람으로 타인과 스스로에게 인식된다. 치매 이전에는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성을 이성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으나, 인지 저하가 비가역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치매 이전과 동일한 사고 과정을 거칠 수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의 말기 치매 환자는 통합적인 삶을 구성하기 위한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한다.
첫째, 말기 치매 환자는 과거의 삶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다. 이전에 발생한 일을 회상하지 못하며 파편화된 상태의 기억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억 상실은 환자가 자신이 살아온 삶 전반에 대해 평가를 내리거나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과거의 경험과 선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현재의 선택이 어떠한 이유와 가치 판단의 연속선 위에 놓여 있는지 설명할 수 없으며, 이는 자율성의 핵심 요소인 이유에 근거한 자기지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둘째, 치매가 진행됨에 따라 응집력 있는 자아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하다. 말기 치매 환자는 과거와 미래가 연결된 통합적인 삶에 대한 개념조차 부재한 상태이므로 치매 이전과 이후의 삶 모두를 포괄한 삶 전체를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고, 추론, 이해, 판단과 같은 고차원적인 인지 기능을 상실한 상태이다. 또한 치매 이전에 형성했던 선호와 가치를 유지하고 반영하는데에 어려움을 겪으며 이는 이전의 선호에 따라 기억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잃은 것으로 간주된다. (Jongsma et al., 2015, p. 7) 일관된 자아 의식이 붕괴된 상태에서는 선택을 삶 전체의 행위자로서 책임질 수 없다는 점에서 자율성의 규범적 토대를 약화시킨다.
셋째, 말기 치매 환자는 장기적 계획을 유지할 수 없다. 연속되지 않은 시간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현재가 아닌 다른 시점에 존재하는 자신에 대한 인지가 부족하다. 현재 시점에 지니고 있는 선호나 감정에 대해서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므로 미래에 대한 계획 수립과 실천이 어렵다. 치매 환자와 달리 통합적인 삶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 사람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미래의 자신의 내적, 외적 상태에 대해 예상한다. (Buford, 2017, p. 3) 자율성이 통합적 삶의 설계를 전제한다면, 미래의 자신을 고려할 수 없는 상태인 치매 상태는 삶 전체를 규율하는 선택을 내릴 능력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넷째, 치매 환자는 자신의 비판적 이익을 위한 욕구를 드러내기 어렵다. (Dworkin, 1993, ch. 8, 1970, Maslow, 1987, pp. 26-39.) 결핍을 느끼고 의식적으로 더 많은 것을 탐하는 욕망과 달리, 욕구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심리적 상태이다. 욕구는 하위 욕구가 충족되어야 상위 단계의 욕구가 나타나는 순차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위 욕구는 생존과 안전, 보호를 보장받고 싶어하는 심리적 상태와 관련되며 이러한 욕구가 해소되어야 남들로부터의 존경과 안정, 자아실현을 목표로 성장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된다. 말기 치매 상태의 환자는 욕구를 드러냄에 있어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들의 욕구는 순간적인 자극과 감정에 따라 급변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선호가 이유에 의해 정당화된 선택인지 단순한 반응인지를 구별할 수 없으며, 이는 자율적 선택과 비자율적 반응 사이의 경계를 붕괴시킨다.
비판적 이익의 증진
개인의 이익은 향유적 이익(experiential interests)과 비판적 이익(critical interests)으로 재구성된다. (Dworkin, 1993, ch. 7–8) 전자는 특정 시점에서 느끼는 편안함, 즐거움과 같이 경험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가리키는 반면, 후자는 ‘어떤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설정하는 장기적 목표, 품위, 관계, 도덕적 신념에 관한 관심을 의미한다. 통합적 삶은 비판적 이익을 설계하고 일관되게 추구하는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자신의 생애를 하나의 서사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단지 현재의 경험을 더 편안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어떠한 삶이 잘 설계되고 실천되는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세우고 이를 지키고자 한다. 통합적 자기 이해는 이러한 비판적 이익을 수립하고 충돌하는 순간적 욕구들 가운데 어느 것을 제한해야 할지를 판단하는 규범적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자율성의 핵심을 이룬다.
말기 치매 상태는 이러한 비판적 이익을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인지적 조건들을 근본적으로 침해한다. 치매 환자는 여전히 특정한 음식, 음악, 활동에 즐거움을 느끼거나 누군가의 손길에 위안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향유적 이익의 차원에 머무른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심각한 기억 상실, 시간적 연속성의 붕괴, 자아 정체성의 파편화, 장기적 계획 능력의 상실은 환자가 자신의 삶 전체를 평가하고 그 삶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기를 바라는지를 사유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즉, 치매 환자는 현재의 쾌, 불쾌에 대한 선호는 표현할 수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비판적 이익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검토할 수 없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통합적 삶의 관점에서 자기 삶을 설계하고, 언제 어디까지 치료를 받으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반면 사전의료지시서는 인지 기능이 온전한 상태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성에 근거하여 작성된 결정이다.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하는 행위는 자신의 미래 상태를 고려하여, 그 상태에서도 자신이 따르고자 하는 규범을 미리 설정하는 자기지배의 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전의료지시서는 말기 치매 상황에서 환자의 자율성을 대체하거나 억압하는 외부적 기준이 아니라, 환자 자신의 통합적 자율성이 시간적으로 연장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말기 치매 상태에서의 자율성의 규범적 권위는 마지막으로 그 조건을 충족했던 시점의 결정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치매 환자의 자율성에 대한 학자들의 반박
말기 치매 환자의 선택보다 치매 이전의 선택이 우선시되어야한다는 주장에 대해, Jaworska와 Shiffrin과 같은 일부 학자들은 치매 환자의 현재 선호가 도덕적으로 존중받아야하며, 사전의료지시서를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을 드러내었다. 먼저, 비판적 이익의 본질은 삶의 통일성이 아닌 ‘가치’에 있다는 반론을 고려할 수 있다. (Jaworska, 1999, pp. 105–138) 삶에 대한 일관된 서사는 개인이 갖는 가치관과 항상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존재하며, 선택이 무조건 삶 전체를 일관된 가치 체계에 근거하여 내려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율성은 통합적 삶을 구상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첫번째 전제의 논의는 비약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헌신하며 살기로 다짐한다면 이는 부모의 가치관에 따른 자율적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를 갖는 시점과 부모의 삶 전체를 통합적으로 고려하였을 때, 부모의 선택은 통합적인 삶을 계획한 결과가 아니다. 치매 환자가 여전히 어떤 대상이나 경험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가치 반응 능력은 치매 환자를 단순한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도덕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존재로 만든다. 치매 환자는 본인의 일관된 의지를 드러낼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 (Shiffrin, 2004, p. 205) 치매로 판정받는 시점부터 치매의 정도가 심해지는 과정 전반에서 특정한 대상에 대한 일관된 선호를 보이고,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통제하고자 하는 의사를 지속적으로 보이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는 환자가 단순한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능동적으로 관여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두번째 전제에 제시된, ‘치매 환자는 통합적인 삶을 구성하는 조건을 상실했다’는 설명은 반박 가능하다.
가치 평가와 통합적인 자율성 행사의 차이에 근거한 재반박
그러나 Jaworksa의 비판적 이익과 자율성간의 필연성 부족에 대한 반론은 자율성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다. 본 논의에서 자율성은 단순히 특정 순간에 가치에 반응하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 판단들을 시간적으로 연결하여 삶 전체를 하나의 규범적 질서 속에서 자기지배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치매 환자가 현재 경험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되지만, 이는 순간적 반응일 뿐 자신의 삶 전체를 구성하는 통합적 판단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부모의 자녀 양육 사례는 오히려 이를 뒷받침한다. 부모의 헌신은 그 순간의 선택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며 “자녀를 우선시하는 부모”라는 자기 이해 속에서 이루어진다. 반면 말기 치매 환자의 현재 선호는 이러한 시간적 연속성과 자기 이해로부터 단절되어 있으며, 과거의 자신이 누구였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또한 현재 가치에 부합하는 선택이 곧 비판적 이익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비판적 이익은 깊은 성찰과 합리적 숙고를 통해 삶에 진정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포함한다. 치매 환자의 현재 선호는 표면적으로는 가치에 상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배후의 실질적 이유나 장기적 함의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더욱이 인지 능력이 손상된 상태에서는 현재의 만족을 과대평가하고 미래의 자신과 그 정체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더욱 심화된다. 결과적으로 현재 선호에 따른 선택은 장기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개인의 비판적 이익을 훼손할 수 있으며, 이는 치매 이전의 자율적 판단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를 더욱 강화한다. 두번째로 Shirffrin의 반박에 대해, 의지를 행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선택이 삶 전체의 구조를 결정하는 사안에 대해 정당화될 수 있는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니다라고 재반박할 수 있다. 경험을 통제하려는 현재의 의지는 돌봄과 안위의 방식에 있어서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지만, 자신의 생애를 어떠한 가치와 서사로 마무리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통합적 자기지배의 능력을 전제한다. 또한 자율성의 행사로서 가치를 수정하거나 재평가하는 것과, 질병으로 인해 과거의 가치와 이유 형성 능력이 붕괴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전자는 통합적 자기지배의 한 방식이지만, 후자는 그러한 자기지배를 수행할 능력 자체의 상실이다. (Jongsma, 2020, pp. 90–92) 치매 환자의 가치와 선호 변화는 후자에 해당한다. 치매 환자가 치매 발생을 기점으로 일관되고 뚜렷한 가치를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과거와 다른 욕구를 보이는 것은 성찰과 통합적 삶을 고려한 재평가의 결과가 아니라 신경학적으로 손상된 비자발적인 변화에 불과하다. 이는 뇌종양으로 인해 뇌가 물리적으로 손상되어 성격이 변한 사람의 새로운 선호를 그의 진정한 선택으로 보기 어려운 것과 같다. 따라서 치매 환자는 여전히 자신의 삶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는 통합적인 삶을 구상하는 능력이 여전히 결여되어있으며, 그의 선택은 자율적인 것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결론
본 글은 사전의료지시서와 말기 치매 환자의 의사가 대립하는 경우, 어떤 판단이 도덕적으로 우선하는지를 자율성과 통합적 삶의 개념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 두 전제를 연역적인 구조로 설정하였다. 첫째, 자율적인 선택과 자율성을 수호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고려한 Dworkin의 견해를 바탕으로, 자율성은 단순히 외부 간섭의 부재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삶을 하나의 통합적 서사로 구성하고 그 가치와 신념에 근거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보존됨을 보였다. 둘째, 말기 치매 상태는 이러한 통합적 관점을 유지하기 위한 인지적 조건을 침해하므로 치매 이후의 선택은 삶 전체의 자율적 판단을 반영하지 못한다. 따라서 인지 기능이 온전한 시기에 작성된 사전의료지시서가 말기 치매의 현재 선호보다 더 자율적이며 규범적 권위를 지닌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어서 치매 환자의 의사도 존중받아야 하는 능력을 지닌다는 반론을 고려하였으나, 오히려 치매 이전의 선택을 우선시 하는 것이 환자의 전체적 삶의 일관성과 자기 결정의 연속성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식이라는 주장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입장은 Dworkin의 입장을 계승하되 그 근거를 통합적 서사 개념과 인지 조건의 분석을 통해 더 체계적으로 다듬음으로써, 기존 논의보다 자율성의 시간적, 서사적 속성을 정밀하게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Jaworska나 Shiffrin이 제시하는 현재의 가치 중심 접근과 달리, 본 글은 자율성을 전체적 행위자에 대한 개념으로 재구성하여 말기 치매 상태의 자기 정체성 붕괴가 왜 도덕적 판단의 구조를 바꾸는지 설명한다. 기존 연구가 환자의 현재 경험을 존중해야 한다는 윤리적 직관을 강조한 반면, 본 글은 향유적 이익과 비판적 이익의 구분을 다시 조명하여 고도의 인지적 능력이 요구되는 도덕적 자기 규율이 왜 환자의 전체적 자율성 보존에 더 적합한 기준인지를 제시하였다. 개인의 자율성은 시간적 연속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지며, 인지 능력의 상실이 자율성과 통합적 삶의 근본 조건을 붕괴시킬 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규범적 권위 이동은 정당화될 수 있다. 이는 치매 상황뿐 아니라, 의사결정 능력 상실이 발생하는 다양한 질환 혹은 노화의 말기 단계에서 자율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로 확장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순수한 규범 윤리적 분석에 국한되며, 법적 제도 설계나 사전의료지시서의 구체적 절차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또한 치매 환자의 모든 선호가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 자아의 조건이 상실된 말기 단계에서 생명 연장 여부와 같은 중대한 의료 결정의 규범적 근거가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를 고찰한 것이다. 따라서 이 결론은 치매 환자들의 삶 전체를 고려하여 그들을 과거에 구성했던 가치와 자기 서사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본 글이 치매 환자의 존엄과 자율성을 가장 깊은 층위에서 수호하기 위한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참고문헌
국내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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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ffrin, Seana Valentine, and Justine Burley. “Autonomy, Beneficence, and the Permanently Demented.” Dworkin and His Critics: With Replies by Dworkin, Blackwell Publishing Ltd,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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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workin의 저서 Life’s Dominion: An Argument about Abortion, Euthanasia, and Individual Freedom 중 제 8절 Life Past Reason에서의 ‘Critical Interest’를 ‘비판적 이익’으로 번역하였다. 혹자는 critical의 의미가 ‘비판적’이라는 의미보다 ‘중대한 이익’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전의료지시서와 같은 문제에서 치매 등으로 인해 현재의 ‘향유적 이익 (experimental interests)’만이 남아있는 환자도 과거에 설정한 이해관계를 존중해야한다고 주장한 점에 주목하여 ‘중요한 이익’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러나 Dworkin이 구분한 이익 중 최선의 이익(best interest)과 구별됨을 드러내기 위해서와, ‘비판적인’이 disapproving만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비판적인’으로 본 글에 활용하였다. Life’s Dominion: An Argument about Abortion, Euthanasia, and Individual Freedom의 국내 번역본 『생명의 지배영역: 낙태, 안락사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국내 논문 「환자의 ‘최선의 이익(best interest)’에 관한 연구 - 로널드 드워킨의 생명 이해를 중심으로」에도 ‘비판적 이익’으로 번역되었으므로 보편적인 활용을 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