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본) 과제-09 기말과제 007-20 임예지
제목: 치매 환자의 현재적 선택이 갖는 우선성: 자율성의 가치 추구 관점을 중심으로
서론
인지 기능이 저하된 치매(dementia)의 상황에서는 환자의 의사결정을 둘러싼 근본적인 난제가 제기된다. 이에 따라 치매 관련 논쟁은 ‘치매 상태에서의 현재적 의사결정과 과거의 사전의료결정(advance directives) 중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만일 치매 환자의 현재적 자율적 선택을 과거의 선택에 앞서 인정할 수 있다면, 환자가 과거에 가졌던 장기적 가치나 정체성이 보호되지 않을 위험이 있다. 반대로, 치매 환자의 현재적 선택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면, 과거 환자의 결정을 절대시하게 되어 현재 환자의 의지와 욕구는 배제되는 문제가 생긴다.
환자의 자율적인 선택과 관련된 딜레마는 결국 자율성이란 무엇이며, 치매 환자는 자율성을 갖는가라는 기초적인 문제로 귀결된다. 대표적인 학자 드워킨(1986)은 내재적 자율성(intrinsic autonomy)의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자율성이 비판적 이익(critical interests)1에서 기인한다는 시각이다. 비판적 이익은 삶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선택 및 행동과 관련되어 있다. 쾌락의 추구와 밀접하게 관련된 향유적 이익(experiential interests)과 달리, 비판적 이익은 쾌락 및 고통과 상관없이 개인이 무엇을 옳다고 믿는지에 대한 판단을 반영한다.
드워킨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가치체계를 설계할 능력’을 비판적 이익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설정하며, 개인의 일관된 가치체계를 반영한 사전의료결정이 진정한 자율적 선택이라고 본다 (Dworkin 1995, p. 201). 즉, 치매 발병 후의 선택이 사전의료결정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드레서(1995)는 실제 인간의 삶이 일관된 서사로 유지되지 않으며, 통일성을 보존하기 위해 현재 환자의 욕구를 배제하는 방식은 부당하다고 비판한다 (Dresser 1995, p. 35). 이를 기반으로 드레서는 환자의 현재적 의사결정이 사전의료결정을 거스를 수 있음을 논증한다. 본고는 문제 설정에 있어 드레서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그러나 드레서의 논의는 한계를 지닌다. 드레서는 드워킨이 설정한 비판적 이익의 개념을 비판하면서도 이를 개선하거나 재구성할 이론적 토대를 제시하지 못한다. 이에 본고는 자워스카(2005)가 제시한 가치 추구 능력(capacity for value)의 관점을 도입해 비판적 이익과 자율성의 개념을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 관점은 비판적 이익이 개인이 스스로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본고는 가치 추구의 관점에서, 드워킨의 비판적 이익 개념을 전제로 하더라도 치매 환자의 자율성은 성립하며, 그 결과 환자의 현재적 자율적 선택이 과거의 사전의료결정을 정당하게 거스를 수 있음을 주장한다.
본고는 다음의 세 가지 전제를 통해 결론을 연역적으로 도출한다. 첫째, 자율성의 핵심은 가치 추구 능력에 있다는 점이다. 둘째, 치매 환자 역시 가치 추구 능력을 지닌다는 점이다. 셋째, 자율적 선택이 충돌하는 경우에는 현재의 가치를 가장 충실히 반영한 추후의 의사결정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세 전제를 종합함으로써, 본고는 치매 환자의 현재적 자율적 선택이 과거의 사전의료결정을 정당하게 거스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 먼저, 삶 전체의 일관된 가치체계를 갖추지 않더라도, 스스로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는 자율적이라는 점을 논증한다. 비판적 이익은 일관된 가치체계로 환원되지 않으며, 가치 추구 능력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을 보인다. (2) 다음으로, 치매 환자는 가치 추구 능력이 있으므로 자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논증한다. 실제 사례를 통해 치매 환자의 자율적 선택을 경험적으로 확인한다. 또한, 삶의 서사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자율성을 검토함으로써, 치매 환자 역시 자율성을 지닌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유추한다. (3) 마지막으로, 과거와 현재의 자율적 선택이 충돌할 때, 현재 가치를 가장 잘 반영한 추후의 선택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점을 연역적으로 논증한다. (4) 한편 마지막 주장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현재의 가치는 순간적 선호에 그칠 수 있으므로 장기적 가치보다 우선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비판이다. 둘째, 치매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가치 변화는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질병의 불가피한 산물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가치를 자율성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반론이다. (5) 그러나 해당 반론은 다음의 두 지점에서 반박할 수 있다. 첫째, 과거와 현재의 가치는 모두 본질적으로 비서사적이며 변화 가능하다는 점이다. 둘째, 자율성의 핵심은 가치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형성되었는가가 아니라, 현재의 주체가 그 가치를 어떻게 내재화하고 실제로 추구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6) 최종적으로, 본고는 가치 추구의 관점에서 환자의 현재적 선택이 우선시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이에 따른 함의를 검토한다.
본론
가치 추구 능력으로서의 자율성
비서사적 삶의 구조
자율성의 핵심 조건으로 비판적 이익을 상정하더라도, 이는 곧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가치체계를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비판적 이익이 있으며 자율성을 가지지만 자신의 삶을 일관된 가치체계로 인식하지 못하며 이에 따라 생을 살아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삶을 일관된 이야기로 엮으려는 시도보다,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가려는 노력이 인간에게 더 흔한 삶의 방식일 수 있다 (Dresser 1995, p.36). 인간은 미리 가치체계를 세우고 그에 맞추어 삶을 구성하기보다는 일상의 사건들을 독립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일정한 가치체계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개인은 사회적 역할에 따라 서로 다른 가치 영역을 동시에 가지며 이러한 가치들의 우선순위가 달라서, 하나의 통합된 서사로 선제적으로 환원하기 어렵다 (Dresser 1995, p. 36). 어떤 사람은 지적 탐구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저명한 법철학자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지적 장애가 있는 아이를 돌보는 부모로서 가족의 안녕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고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개인의 가치들은 서로 이질적이며, 어떠한 가치를 가장 중요시할지에 대해서 우선순위가 절대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과 인간관계의 변화에 따라 가치체계가 꾸준히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현실적 조건을 고려할 때, 비판적 이익의 개념을 일관된 가치체계로 환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비판적 이익의 핵심인 가치 추구 능력
비판적 이익은 일관된 삶의 서사가 아닌, 각자 개인들이 추구하는 가치로부터 기인한다. 개인을 선택으로 이끌고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가치 있고 바람직한가에 대한 확신(convictions about what is good to have)이기 때문이다 (Jaworska 2005, p. 113). 가치는 단순한 욕구(desire)와는 달리 개인이 따르는 규범적 기준을 제공한다. 따라서 비판적 이익은 가치로부터 도출되며, 가치는 개인이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도록 만드는 자율성의 핵심 조건으로 기능한다.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단순 욕구를 추구하는 것과는 구분되는 특징들이 있다 (Jaworska 2005, p. 115). 먼저, 가치는 개인의 자기(self)를 구성한다. 성욕, 특정 음식에 대한 선호 등의 욕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지만, 가치가 손상되면 자기의 본질적인 부분을 잃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가치 추구는 자신에 대한 규범적 정향성이다. 또한, 가치 추구에 대해서는 항상 이유(rationale)가 뒤따르기에, 선택의 순간에서 개인은 서로 충돌하는 가치들 사이에 우선순위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가치 추구는 자아 존중의 기준으로 기능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 추구 여부와 정도에 따라 선택의 좋고 나쁨을 구분하고, 본인을 칭찬하거나 비판한다. 결국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곧 행동에 대한 기준과 이유를 세우고 무엇이 더 중요한지 순위를 매기며, 그 기준을 따라 자신에게 방향을 부여하는 것이다.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삶 전체를 일관된 가치체계에 따라 설계할 능력’은 필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헌신적인 아버지가 아이들의 행복을 자신의 즐거움보다 중요하게 여겨 이에 따라 자율적 선택을 내리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가치 때문이지, 삶의 총체적 서사나 자기 일관성 때문이 아니다 (Jaworska 2005, p. 116). 가치 추구에서 결정적인 것은 해당 가치가 삶 전체의 일관성과 얼마나 조화를 이루는가가 아니라, 그 가치가 현재의 주체에게 비판적(critical) 관점에서 검토된 결과 가장 바람직하다고 받아들여지는가이다. 따라서, 삶의 통일성과는 관계 없이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면 비판적 이익의 관점에서도 해당 선택은 자율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치매 환자의 가치 추구 능력
치매 환자가 보여주는 가치 추구
치매 환자의 상황처럼 인지 기능이 저하되어 의사결정 능력이 일부 손상되었더라도 개인이 가치를 추구하는 능력 자체는 보존된다 (Sergeant, 2024, p. 384). 실제로 치매 환자의 일상적인 사례 및 어린아이와의 유추를 통해 그들이 여전히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임을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자워스카(2005)는 실제 치매 환자의 사례들을 통해 환자가 여전히 가치 추구 능력을 지닌다는 점을 보인다. 예를 들어, 환자 Mrs. D는 시간의 흐름이나 자신의 나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새로운 기억도 형성할 수 없었지만, 돌봄센터에서 자발적으로 조교로 일하고 보건 실험에 참여하기로 선택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선택이 본인에게 바람직한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녀는 “사람을 그냥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함께 일할 수 있어요.” “‘안돼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게 저와 제 동료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라면 반드시 할거에요.” 등의 참여 동기를 제시하였다 (Jaworska 2005, p. 118).
Mrs. D는 이전 삶의 주요 기억을 잃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지 못하는 상태라는 점에서 일관적 삶의 서사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타인을 돕는 것이 그녀가 과거 삶에부터서 일관되게 추구해 온 가치인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럼에도, Mrs. D는 현재의 순간에 사람을 돕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가치라는 결론을 내린 후, 자신의 선택을 특정한 이유(rationale)에 근거해 설명하고, 그 선택을 자아 존중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는 치매 환자가 가치 추구 능력을 바탕으로 내린 자율적 선택의 일환이다.
또한 가치의 내용은 반드시 이타적일 필요는 없다. 또 다른 사례인 Dr. B 역시 날짜와 시간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인지 기능이 심각하게 저하된 상태였지만, 의사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일에 강한 자부심을 느꼈다 (Jaworska 2005, p. 118). 그는 “다른 곳에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여기서는 당신과 함께 일할 수 있다”고 말하며, 사회적 지위 및 자기 이미지와 같은 개인적 가치를 근거로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였다. 이처럼 인지 기능이 저하된 상태에서도 치매 환자들은 본인만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
주변인의 대우와 가치의 인정
나아가, 치매 환자가 갖는 가치 추구 능력은, 환자와 상태가 유사한 어린아이를 대하는 보편적인 태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어린이는 일관된 인격이나 장기적 삶의 계획을 형성하지 못한 존재이며,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어린이의 선택을 자율적 선택으로 인정하고 이를 최대한 존중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 선택을 존중할 수 없을 때조차 미안함을 느끼거나 이유를 설명하며 정당화를 시도한다 (Shiffrin 2004, p. 205).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몸이 아파도 반드시 등교하겠다”는 선택을 내릴 때, 아이는 ‘선생님과 이전에 등교하겠다고 한 약속이 가장 최우선이다’ ‘친구들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 등의 가치를 내재화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이러한 가치가 통합된 인격 구조나 장기적 삶의 계획에서 형성된 것은 아닐지라도 아이는 스스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추구한다. 부모는 이러한 가치 추구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따라서, 선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지금 나가면 더 아플 수 있어”와 같이 아이의 가치를 침해하는 이유를 정당화하며 설명한다. 이는 아이의 판단을 가치 추구에 근거한 자율적 판단으로 대우하기 때문에 등장하는 태도다.
어린이의 상황은 치매 환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치매 환자 역시 일관된 서사를 구성할 능력이나 인지 기능은 부족하지만, 간병인과 주변 사람들은 환자의 작은 선택과 요구를 가능한 한 존중하려 노력한다. 이는 환자의 선택이 여전히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반영하고 있으며 주변인 역시 이러한 가치를 간접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치매 환자는 가치를 추구하는 자율적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
추후 선택의 우선성
앞선 논의에서는 가치 추구 능력이 자율성의 기준이 된다는 점을 보였다. 또한 치매 환자 역시 가치 추구 능력을 지니며, 이에 근거하여 자율적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치매 발병 이전과 이후에 내려진 선택이 모두 자율적 선택으로 평가될 수 있으며 그 결과 서로 다른 시점의 자율적 선택이 충돌하는 상황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충돌 상황에서는, 두 선택 가운데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 기준이 필요하다.
가치 추구 관점에 기반하여 본다면, 이러한 충돌이 발생할 경우 현재의 가치를 가장 충실히 반영하는 추후의 선택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 결론은 다음 두 전제에 의해 연역적으로 정당화된다. 첫째, 자율적 선택 중에서도 개인이 추구하는 현재 가치를 충실히 반영하는 선택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치매 환자의 추후 선택은 현재의 가치를 더 충실히 반영한다는 점이다.
현재 가치를 반영한 자율적 선택의 우선성
자율적 행위에 있어 현재 가치의 우선성은 두 가지 근거를 통해 도출할 수 있다. 먼저, 자율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과거의 통일성이 아닌 현재의 가치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위 논의에서는 자율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전체 가치체계의 일관성보다, 어떠한 가치들을 추구하며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지가 결정적인 요소임을 정당화하였다. 따라서 자율적 선택은 현재 순간에서 바람직하다고 확신되는 가치에 대한 판단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또한, 자율적 주체는 시간이 흐르며 추구하는 가치나 이익이 변화할 수 있으며, 과거의 결정과 현재의 결정이 충돌할 때 과거의 결정을 수정할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Dresser 1995, p. 35). 현재 가치를 우선하는 것은 가치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주체가 자신의 현재적 기준에 따라 삶을 재정립할 자유를 보존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논지는 특히 치매 환자에게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치매 환자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현재의 상태에 영구적으로 머물러야 하므로 현재의 가치를 고려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만일 과거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우선한다면, 환자는 더 이상 자신의 의지로서 이해하지 못하는 가치에 종속된다 (Shiffrin 2004, p. 205).
추후 선택의 현재 가치 반영성
이때, 현재의 가치를 더 충실히 반영하는 것은 치매 발병 이후의 선택이다. 치매 환자에는 큰 심리적 변화가 발생하므로 환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역시 이전과 달라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Shiffin 2004, p. 211). 이러한 변화는 가치가 새롭게 형성되거나 없어지는 경우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들 사이의 상대적 중요도가 재조정되는 방식으로도 나타난다 (Sergeant, 2024, p. 383). 이 경우, 과거에 내려진 선택이 환자의 현재 가치를 예측하거나 반영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치매 이전에는 자기계발과 혼자 있는 시간을 중시하던 사람이 치매 발병 이후에는 돌봄 제공자와의 친밀감이나 대인 관계를 가장 우선적인 가치로 여길 수 있다.
따라서 자율적 행위 중에서도 개인이 추구하는 현재 가치를 가장 충실히 반영하는 선택이 우선되어야 하며, 치매 발병 이후의 추후 선택은 현재 가치를 더 직접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자율적 선택에 비해 현재적 선택이 우선성을 갖는다.
현재 가치의 우선성에 대한 반론과 재반론
자율적 선택 중 현재 가치를 반영하는 선택이 우선시된다는 첫 번째 전제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과거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숙고를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가치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과거의 선택은 인지능력이 온전할 때의 깊은 성찰과 미래에 대한 고려가 반영되어 있었던 반면, 현재의 가치는 순간적 감정이나 상황 변화에 크게 좌우될 수 있다. 따라서 자율성을 판단할 때 과거의 가치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비판이다.
둘째, 치매 환자의 가치 변화는 자유로운 자기결정의 결과라기보다 질병의 영향에 의해 발생한 것이므로, 이를 근거로 과거의 결정을 수정하는 것은 자율성의 행사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가치 변화의 원인은 치매라는 질병이므로, 환자는 어떠한 가치를 유지하고 어떠한 가치를 포기할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 (Jongsma 2020, p. 91). 이러한 상황에서 치매로 인해 새로 생기거나 수정된 현재 가치를 우선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두 가지 이유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첫째, 과거의 가치가 현재 가치보다 더욱 안정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은 일관된 서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한 개인의 가치 역시 고정적이거나 일관적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과거의 가치 역시 당시의 상황과 조건 속에서 형성된 하나의 순간적 산물이다. 인간의 삶 자체가 비서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면, 과거 가치가 더 안정적이거나 체계적이라는 주장도 성립하기 어렵다.
둘째, 가치 변화가 치매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다는 사실만으로 현재 가치의 우선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이 갖는 대부분의 가치는 가정환경, 문화, 교육, 사회적 맥락 등 수많은 비선택적 요소들에 의해 형성된다 (Sergeant 2024, p. 385). 그럼에도 새롭게 형성된 가치를 바탕으로 결정을 수정할 자유는 보편적으로 인정한다. 이는 가치가 자율적으로 형성되었느냐보다, 현재의 주체가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즉 해당 가치를 자신의 것으로 내재화하고 적극적으로 추구하는가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치매 환자의 현재 가치는 치매라는 외부 요인에 영향을 받았다는 이유로 중요도가 낮아질 수 없으며, 오히려 현재의 주체가 실질적으로 무엇에 의미를 두는지를 반영하기 때문에 가장 우선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결론
본고는 비판적 이익과 자율성의 개념을 가치 추구 능력(capacity for value)의 관점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치매 환자의 현재적 선택이 과거의 사전의료결정보다 우선될 수 있음을 연역적으로 논증하였다. 먼저, 기존의 자율성 논의가 전제하는 일관적 가치체계가 실제 인간의 삶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며, 자율성의 핵심은 삶의 통일성이 아니라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에 달려 있음을 보였다. 해당 논증은 비판적 이익이 가치 추구 능력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토대로 정당화되었다. 다음으로, 실제 치매 환자의 사례와 어린이의 사례에 대한 경험적, 유추적 검토를 통해, 치매 환자 역시 가치를 추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제시하였다. 또한, 과거와 현재의 자율적 선택이 충돌할 때는 현재 가치를 가장 잘 반영한 추후의 선택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점을 연역적으로 도출하였다. 마지막 주장에 대해서는 과거 가치의 안정성과 현재 가치의 비자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두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음을 보였다. 그러나 두 반론에 대해, 과거의 가치 역시 일시적이라는 점, 그리고 모든 가치의 형성이 비선택적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 형성 과정보다는 현재 주체가 그 가치를 어떻게 수용하고 추구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통해 반박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본고는 가치 추구 능력의 관점에서 치매 환자의 현재적 선택을 자율적 행위로 인정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확보하고, 현재적 자율적 결정의 우선성을 논증하여, 환자의 현재적 의사결정이 과거의 사전의료결정을 정당하게 거스를 수 있다는 결론을 제시하였다.
본고는 가치 추구 능력을 중심으로 치매 논쟁을 바라봄으로써, 비판적 이익의 관점을 전제로 하더라도 치매 환자는 자율성을 가질 수 있음을 보였다. 이러한 접근은 드워킨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에만 그쳤던 드레서의 논변과 달리, 비판적 이익의 틀 내부에서 자율성을 재구성했다는 차별성을 지닌다. 또한, 자워스카는 가치 추구 관점에서 치매 환자의 자율성을 입증하는 데에 주력하였다면, 본고는 자율적 선택이 충돌할 경우 현재적 선택이 갖는 우선성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의하였다. 이를 통해 본고는 전통적 논쟁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던 가치 추구의 관점을 재조명하고, 이를 토대로 기존 논의를 보완하는 논증을 전개하였다.
본고의 결론은 치매 환자의 현재적 선택을 법적 혹은 제도적 차원에서 정당화하는 시도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즉, 자율적 선택의 법적 책임, 보호자 및 의료진의 판단 권한 등과 관련된 논의는 본고의 범위에 속하지 않으며, 별도의 정책적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본고의 기여는 이러한 후속 논의가 가능하도록 개념적 토대를 재정비하고, 치매 환자의 현재적 선택을 논의의 정당한 대상으로 복귀시켰다는 점에 있다.
참고문헌
외국 문헌
Dresser, Rebecca. “Dworkin on Dementia: Elegant Theory, Questionable Policy.” The Hastings Center Report 25, no. 6 (November 1995): 32–38. https://doi.org/10.2307/3527839.
Dworkin, Ronald M. Life’s Dominion: An Argument about Abortion, Euthanasia, and Individual Freedom. New York: Alfred A. Knopf, 1986.
Jaworska, Agnieszka. “Respecting the Margins of Agency: Alzheimer’s Patients and the Capacity to Value.” Philosophy & Public Affairs 28, no. 2 (April 1999): 105–38. https://doi.org/10.1111/j.1088-4963.1999.00105.x.
Jongsma, Karin. “Losing Rather than Choosing: A Defense of Advance Directives in the Context of Dementia.” The American Journal of Bioethics 20, no. 8 (August 2, 2020): 90–92. https://doi.org/10.1080/15265161.2020.1781957.
Sergeant, Anand. “The Problem of Value Change: Should Advance Directives Hold Moral Authority for Persons Living with Dementia?” Bioethics 39, no. 4 (December 15, 2024): 381–88. https://doi.org/10.1111/bioe.13386.
Shiffrin, Seana Valentine. “Autonomy, Beneficence, and the Permanently Demented.” Dworkin and His Critics, January 2004, 193–217. https://doi.org/10.1002/9780470996386.ch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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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워킨의 저서 Life’s Dominion: An Argument about Abortion, Euthanasia, and Individual Freedom의 번역본인 『생명의 지배영역: 낙태, 안락사 그리고 개인의 자유』는 experiential interests를 ‘향유적 이익’, critical interests를 ‘비판적 이익’으로 번역하여 사용했다. 비판적 이익은 단순한 선호를 넘어 자기 삶의 좋은 이유와 의미를 구성하는 평가적, 성찰적 관심을 지칭하므로, 본고 역시 관행에 따른 번역어를 사용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