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본) 과제-09 기말과제 011-15 김진섬
제목: 정책적 생명 가치 평가의 규범적 기준: 기대여명 기반 지표(VSLY)의 정당성 재검토
서론
현대의 보건·의료·환경 규제 정책에서 사망 위험 감소 효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정책결정자들이 지속적으로 직면하는 핵심적 난제다. 감염병 대응, 신약 허가, 보험 급여 기준 설정, 교통·환경 규제 강화 여부를 판단할 때, 정책결정자는 각 조치가 가져올 사망 감소 효과를 금전적 가치로 환산하여 비교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활용되는 지표가 통계적 생명가치(Value of a Statistical Life, 이하 VSL)와 통계적 생명연장 1년의 가치(Value of a Statistical Life-Year, 이하 VSLY)이다. VSL은 사망 위험을 소폭 감소시키는 데 사람들이 지불할 의향을 기반으로 한 단일 생명 단위의 가치를 산정하는 반면, VSLY는 생명 연장 1년의 가치를 측정하여 기대여명에 따라 총 생명 가치를 산정하는 지표이다. 두 지표는 공공정책 평가에서 사실상 표준처럼 활용되고 있으나, 생명의 가치를 어떠한 단위로 평가하는 것이 규범적으로 정당한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본고는 바로 이러한 규범적 기반의 불명확성에서 출발하여, 정책 결정에서 VSLY의 사용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논증함으로써 VSL의 사용을 옹호하고자 한다.
생명 가치 평가를 둘러싼 기존의 학술적 논의는 크게 두 전통으로 나뉜다. 첫째, VSL을 지지하는 절대적 지표 접근은 “존재하는 한 생명은 누구나 동등한 가치 단위를 가진다”는 원칙을 전제로 하며, 이는 칸트적 인간 존엄성과 Rawls(1971)의 평등한 기본권 논의에 뿌리를 둔다(Kant 1785/2011, p. 72; Shell 2008, p. 41; Rawls 1971, p. 60). 이 접근은 정책적 판단이 개인의 도덕적 지위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규범적 근거를 제공하지만, 동등한 가치 단위를 정립할 때 어떤 속성이 생명의 ‘본질적 가치’를 구성하는지에 대해 명시적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남긴다. 둘째, VSLY를 지지하는 기대여명 기반 접근은 생명연장 효과를 정량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는 장점을 바탕으로 공중보건·환경규제에서 널리 활용되며, 총 생존연수를 극대화하는 효율적 정책평가 틀을 제공한다(Hammitt 2007, p. 218; Sunstein 2004, p. 115). 그러나 이 접근 역시 기대여명·연령·선천적 건강과 같은 요소가 생명 가치를 차등하는 정당한 기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규범적 정당화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한다. 두 전통 모두 생명 가치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도구를 발전시켜 왔으나, 공통적으로 “어떤 속성이 생명의 도덕적 가치를 결정하는가”, 그리고 “그 속성들이 정책적 판단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규범적 핵심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이로 인해 VSL과 VSLY의 선택이 단순히 효율성과 평등의 경쟁으로 제시될 뿐, 생명 가치 판단을 구성하는 속성 자체에 대한 이론적 분석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태로 남아 있다. 본고는 바로 이 지점에서 기존 논의의 공백을 보완하고자 한다.
본고의 핵심 주장은 정책 수립에서 생명 가치를 평가할 때 기대여명 기반 지표(VSLY)를 사용하는 것은 규범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본고는 다음과 같은 연역적 논증 전략을 따른다. [1] 먼저, 생명 가치 판단에서 고려될 수 있는 속성들을 분석하여, ‘본질적 속성’과 ‘비본질적 속성’을 개념적으로 구분하고 기대여명·연령·선천적 건강이 도덕적 지위를 구성하지 않는 비본질적 속성임을 보인다. [2] 다음으로, 공적 정책의 정당성이 모든 시민을 동등한 도덕적 지위를 가진 존재로 대우한다는 원칙에 기반함을 논증하고, 비본질적 속성에 기초한 생명 가치 차등이 왜 허용될 수 없는지를 밝힌다. [3] 한편, 전제 2에 대한 대표적 반론으로 “기대여명 고려는 실질적 평등을 증진한다”는 주장을 검토하고, 생명 가치의 ‘기본 단위’를 차등하는 문제와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문제를 구분함으로써 이러한 반론이 성립하지 않음을 재반박한다. [4] 마지막으로, 기대여명 기반 지표인 VSLY가 설계상 비본질적 속성에 따라 생명 가치를 구조적으로 차등하도록 구성되어 있음을 보임으로써, VSLY가 앞서 확립된 규범적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점을 논증한다. [5] 이상의 논증을 통해 VSLY가 생명 가치 판단의 정당화 조건을 위반한다는 점을 도출하고, 이에 따라 정책적 판단에서 VSLY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제시하며 그 함의를 살펴본다.
본론
생명 가치 평가에서의 본질적·비본질적 속성 구분
본질적 속성의 개념
정책적 맥락에서 생명 가치를 평가할 때 무엇이 “본질적 속성”인지를 먼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본질적 속성이란 어떤 존재를 동등한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의미한다(Shell, 2008, p. 41). 다시 말해, 그 속성이 결여된다면 더 이상 그 존재를 “도덕적 주체”로 인정하기 어려운 성질이어야 한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만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 “목적 그 자체”이며, 이러한 지위는 개인이 가진 재능·사회적 성취·효용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Kant 1785/2011, p. 36). Rawls(1971) 역시 기본권 평등 원리를 통해, 시민의 도덕적 지위는 사회경제적 지위나 자연적으로 주어진 능력과 무관하게 동일하게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Rawls 1971, pp. 18–19). 이는 도덕적 지위를 형성하는 본질적 속성이 후천적 환경이나 우연적 요소에 의해 증감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논의를 종합하면, 생명 가치 평가에서 본질적 속성이란 “하나의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human beingness)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존재가 인간으로서 의식적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존재는 동등한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자격을 획득한다.
비본질적 속성의 개념
본질적 속성과 구별되는 비본질적 속성은 어떤 존재가 도덕적 주체로 인정받는 데 필요한 조건을 형성하지 않으며, 그 존재가 이미 도덕적 주체로 인정된 이후의 삶이 어떠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전개되는지를 설명하는 후속적·경험적 특성을 의미한다(Shell 2008, p. 47). 이러한 속성들은 도덕적 지위의 부여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개인의 능력·환경·사회경제적 배경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형성되며 대체로 개인의 선택과 무관하게 주어진다. 비본질적 속성은 두 가지 점에서 본질적 속성과 명확히 구별된다. 첫째, 비본질적 속성은 도덕적 지위를 판단하는 규범적 기준이 아니라, 이미 도덕적 주체로 인정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서술하는 데 사용된다. 둘째, 이 속성들은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도덕적 존중의 크기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즉, 어떤 사람이 더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덜 존중받아도 된다는 규범적 결론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본질적 속성이 “이 존재가 도덕적 주체인가?”를 결정한다면, 비본질적 속성은 “그 주체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는가?”를 기술하는 속성이다.
기대여명·연령·선천적 건강의 비본질성
정책적 생명 가치 평가에서 반복적으로 고려되는 대표적 속성들—기대여명, 연령, 그리고 선천적 건강 상태—의 규범적 지위를 명확히 하는 것은 이후 논의를 위해 필수적이다. 이 세 속성은 의료 자원 배분, 응급 대응 체계, 공중보건 정책의 우선순위 설정 등 다양한 실무적 맥락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를 판단할 때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지표들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속성들이 생명의 도덕적 기초에 속하는지 여부는 정책적·윤리적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앞서 정립한 개념적 틀에 비추어 볼 때, 기대여명·연령·선천적 건강 상태는 모두 도덕적 지위를 형성하는 본질적 속성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다음의 이유 때문에 비본질적 속성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1] 첫째, 이 속성들은 도덕적 주체성을 부여하거나 박탈하지 않는다. 기대여명이 짧다는 이유로, 혹은 이미 고령이라는 이유로, 또는 선천적 질환이나 장애를 지니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해당 존재가 도덕적 주체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Rawls 1971, pp. 18–19). 이러한 속성들은 단지 한 인간의 생애가 어떠한 시간적·신체적 조건에서 전개되는지를 기술할 뿐, 그 생명이 “동등한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라는 규범적 판단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2] 또한, 이 속성들은 도덕적 지위를 구성하는 필수 조건이 아니다. 기대여명이 변화하거나, 건강 상태가 악화되거나, 혹은 개인이 생애의 어느 시점에 놓여 있더라도, 그 존재가 인간으로서 도덕적 주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즉, 이 세 속성은 인간의 삶의 양상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의 가치를 증감시키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대여명·연령·선천적 건강 상태는 인간의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거나 박탈하는 기준이 아니라, 이미 도덕적 주체로 인정된 존재의 삶의 조건을 서술하는 비본질적 속성이다.
정책적 생명 가치 평가에서 비본질적 속성에 기초한 차등의 부정당성
정책적 생명 가치 평가 정당성의 필요 조건: 동등한 도덕적 고려
공적 정책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을 동등한 도덕적 지위를 지닌 존재로 대우해야 한다는 원칙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규범적 이상이 아니라, 민주적 제도 운영의 기반을 이루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정책은 각 개인의 생명과 권리를 동일한 무게로 고려해야 하며, 특정 집단의 생명이 구조적으로 더 적은 가치를 가진다고 간주되도록 설계되어서는 안 된다. Rawls가 강조하듯, 시민은 사회적 배경이나 자연적 조건과 관계없이 동일한 기본적 존중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이러한 동등성은 정책적 평가 과정에도 그대로 반영되어야 한다(Rawls 1971, p. 65).
정책에서 생명 가치를 평가할 때에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 생명의 ‘가치’는 어떤 개인의 능력, 조건, 환경에 의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요소가 아니라,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보장되는 기본적 도덕적 지위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정책적 판단이 생명을 평가할 때는 이 도덕적 지위를 훼손하지 않는 방향이어야 하며, 생명은 누구의 것이든 동일한 단위를 기준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는 생명 가치를 측정하는 지표가 어떤 속성을 고려하는지, 그 속성이 도덕적 지위와 관련되는지에 대한 엄밀한 기준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정책에서 생명 가치를 평가할 때 동등한 도덕적 고려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비본질적 속성 기반 차등의 동등한 도덕적 고려 원칙 위반
비본질적 속성에 기초하여 생명 가치를 차등하는 방식은 동등한 도덕적 고려 원칙과 직접적으로 충돌한다. 비본질적 속성은 개인이 선택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자연적·사회적 운(brute luck)에 의해 결정되며, 도덕적 지위를 구성하는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속성들을 생명 가치의 기본 단위를 조정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도덕적 지위 자체가 우연한 조건에 의해 증감될 수 있다는 결론을 사실상 받아들이는 셈이 된다(Sen 1987, p. 22). 이는 모든 시민을 동등한 도덕적 존재로 대우해야 한다는 공적 정책의 최소한의 규범적 요구와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비본질적 속성에 기반해 생명 가치의 단위를 달리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로부터 정책적 생명 가치 평가는 비본질적 속성에 기초한 차등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비본질적 속성에 기초한 차등의 부정당성에 대한 반론
비본질적 속성에 기반한 생명 가치 차등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정책의 목표를 실질적 평등1으로 본다면 이러한 규범적 단정은 충분히 타당하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Sen(1987)은 동일한 대우 자체가 불평등을 재생산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개인이 처한 조건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평등 원칙은 실제 삶의 기회를 평등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주장한다(Sen 1987, pp. 15–17).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기대여명이나 건강 상태 같은 비본질적 속성이 도덕적 지위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속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정책이 오히려 더 불공정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된다. 즉, 전제2가 “동등한 도덕적 고려”를 정책 평가의 출발점으로 설정한 것은 타당해 보이지만, 왜 이러한 원칙이 삶의 기회·기능·실질적 보호 수준을 보장하려는 정책적 가치보다 우선해야 하는지는 충분히 논증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규범적 한계 조건으로서의 동등한 도덕적 고려
동등한 도덕적 고려는 실질적 평등과 경쟁하는 정책 목적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정책이 시민을 대상으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를 규정하는 규범적 한계 조건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확보된다. 정책이 인간의 생명을 평가할 때, 그 판단은 특정한 집단을 더 적은 가치의 생명으로 간주하는 방식으로 설계될 수 없으며, 이는 단지 평등의 미덕을 선호하는 문제가 아니라 정책이 인간을 어떤 종류의 존재로 다루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원칙에 속한다. 실질적 평등이 가치 있는 목표라 하더라도, 이 목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 정책이 시민을 서로 대체 가능한 자원이나 편익 단위가 아니라 동등한 존엄을 가진 존재로 다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질적 평등을 목적으로 한 판단조차, 그 자체가 사람들을 조건별로 도덕적으로 차등화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실질적 평등은 정책의 구체적 설계 방식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구현될 수 있는 반면, 동등한 도덕적 고려는 정책의 모든 형태가 만족해야 하는 최소 규범적 조건으로 기능한다(Rawls 1971, p. 70). 한 개인이 더 큰 보호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생명이 다른 사람보다 더 적은 도덕적 가치를 가진다는 규범적 결론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실질적 평등을 추구하는 정책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도, 그 정책은 “누구의 생명이 더 가치가 있는가”라는 문제를 조건적 속성에 따라 결정하지 않는다는 비차등의 전제 위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따라서 실질적 평등이 비본질적 속성에 따라 생명 가치 자체를 달리 설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않으며, “동등한 도덕적 고려”라는 규범적 기준은 여전히 유지된다.
VSLY의 비본질적 속성에 따른 생명 가치 차등 내재성
VSLY의 개념적 구조
VSLY(Value of a Statistical Life-Year)는 정책적 위험 감소의 가치를 측정하기 위해 고안된 지표로, 개인의 생명 가치를 “추가 생존 1년의 가치”에 “남은 기대여명”을 곱하여 산출한다(Hammitt 2007, p. 218). 이러한 산식은 겉으로는 단순한 수학적 구성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명 연장의 효과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남은 생존 기간을 생명 가치의 중심 축으로 설정한다는 개념적 선택을 포함한다. 즉, 정책이 동일한 정도의 사망률 감소를 가져오더라도, VSLY는 기대여명이 더 긴 사람에게 구조적으로 더 큰 생명 가치 증가를 부여하고, 기대여명이 짧은 사람에게는 상대적으로 작은 증가를 부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히 ‘생명연장의 양을 비교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택한 기법’이 아니라, 생명 가치의 총량이 기대여명이라는 특정 변수에 선형적으로 종속되도록 만드는 구조적 특징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VSLY는 생명 가치를 구성할 때 기대여명을 단순한 참고 지표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가치 산정의 기본 단위에 직접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기대여명 기반 산출의 구조적 차등성
기대여명은 앞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연령·선천적 건강·사회경제적 조건 등 개인의 선택이나 도덕적 판단과 무관한 것에 의해 형성되는 비본질적 속성이다. 이러한 속성을 입력값으로 삼는다는 사실은 우연적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VSLY가 생명 가치를 산출하는 방식 자체가 비본질적 속성에 구조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뜻한다(Hammitt 2007, p. 221). 실제로 기대여명이 긴 사람은 동일한 1년 생명연장의 가치가 주어질 때 총 생명 가치가 자동적으로 크게 산출되고, 기대여명이 짧은 사람은 본인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조건들로 인해 더 낮은 생명 가치가 계산된다. 이러한 차등은 정책 집행 과정에서 수정 가능하거나 보정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 VSLY의 정의 그 자체—즉 “총 생명 가치는 남은 기대여명에 비례한다”는 개념적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이다. 결국 VSLY는 생명 가치 산정 과정에서 비본질적 속성의 차이를 생명 가치의 차이로 직접 변환하는 지표로 기능하며, 이는 VSLY가 개념적 설계 단계부터 비본질적 속성에 기반한 구조적 차등을 내재한 지표임을 보여준다.
결론
본고는 정책적 맥락에서 생명 가치를 평가할 때 어떠한 속성이 정당한 기준이 될 수 있는지를 규범적으로 검토하고, 그 분석을 바탕으로 기대여명 기반 지표인 VSLY의 사용 가능성을 평가하였다. 논증의 흐름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생명 가치 판단에 고려될 수 있는 속성을 개념적으로 구분한 결과, 기대여명·연령·선천적 건강과 같은 요소는 인간의 도덕적 지위를 구성하지 않는 비본질적 속성임이 드러났다. 둘째, 공적 정책의 정당성은 모든 시민을 동등한 도덕적 지위를 지닌 존재로 대우해야 한다는 원칙에 기반하며, 비본질적 속성에 따라 생명 가치의 기본 단위를 차등하는 방식은 이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 셋째, 이러한 규범적 조건을 전제로 할 때, VSLY는 기대여명이라는 비본질적 속성을 생명 가치 산출의 핵심 기준으로 삼고 있으므로, 구조적으로 생명 가치에 차등을 내재한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본고는 기대여명 기반 지표인 VSLY가 정책적 판단에서 요구되는 규범적 정당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며, 정책적 생명 가치 평가는 비본질적 속성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 단위(VSL 등)에 기반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본 논의의 기여는 생명 가치 평가에 관한 기존 논쟁을 단순히 효율성과 평등의 대립 구도 속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도덕적 가치를 구성하는 속성이 무엇인지라는 개념적·규범적 문제를 중심에 두어 접근했다는 점에 있다. 기존 연구들은 VSL과 VSLY의 장·단점, 정책적 효율성, 사회적 선호 등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왔으나, 이러한 지표들이 어떠한 속성에 의존하여 생명 가치를 구성하는지, 그리고 그 속성들이 규범적 정당화를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지 못하였다. 본고는 이러한 공백을 보완함으로써, 생명 가치 평가의 규범적 조건 자체를 재정립하고, 정책적 판단에서 고려할 수 있는 속성의 범위를 명확히 설정한다는 점에서 기존 논의와 구분된다. 또한 본고의 결론은 VSLY 사용 그 자체를 일반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책적 정당성이 요구되는 맥락에서만 적용 범위를 제한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과도한 일반화나 오해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정책적 판단에서 생명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시민을 어떤 존재로 대우할 것인가에 관한 규범적 문제이다. 본고의 논의는 기대여명 기반 지표가 제공하는 효율성 또는 예측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정책이 준수해야 할 최소한의 규범적 조건—인간의 도덕적 지위를 비본질적 속성에 따라 차등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우선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은 보건·의료·환경 정책뿐 아니라, 위험 규제, 자원 배분, 사회적 안전망 설정 등 다양한 영역에서 생명 가치 판단의 기준을 재검토하는 데 기초적 방향성을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정책적 맥락에서 생명 가치를 평가할 때는 기대여명 기반 차등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지표가 정당성 요건을 더 잘 충족하며, 이는 향후 생명 가치 평가 논의가 나아가야 할 규범적 기준을 제시한다. 본고에서 제시한 규범적 틀이 앞으로의 정책 설계와 학술적 논의에서 생명 가치 평가의 기준을 재구성하는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외국 문헌
Hammitt, J.K. (2007). Valuing Changes in Mortality Risk: Lives Saved versus Life Years Saved. Review of Environmental Economics and Policy.
Holm, S. (2022). A Life is a Life: On the Moral Value of Life and the Ethics of Resource Allocation. Journal of Medical Ethics.
Kant, I. (1785/2011). Groundwork of the Metaphysics of Morals. (Trans. M. Grego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Rawls, J. (1971). A Theory of Justic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Sen, A. (1987). The Standard of Living.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Shell, S. (2008). Theorizing Moral Status. Philosophical Topics, 36(1).
Sunstein, C.R. (2004). Lives, Life-Years, and Willingness to Pay. Columbia Law Review,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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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실질적 평등’은 단순한 동일 대우(formal equality)가 아니라, 개인이 처한 조건의 차이를 고려하여 결과적으로 유사한 보호 수준이나 삶의 기회를 확보하려는 규범적 관점을 가리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