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본) 과제-09 기말과제 011-14 서시현

제목: HDI의 고정된 역량 리스트와 온정주의(paternalism): 역량 확장 목표와의 긴장

1. 서론

사회를 평가하고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해 삶의 질은 하나의 지표로 수치화되고 있다. 이에 대해 Sen은 한 사람이 이유를 댈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다고 여기는 기능들을 성취할 수 있는 역량이 사회적 배열 평가의 일반적 접근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Sen 1992, p. 5). 이때 그는 역량을 ’어떤 사람이 성취할 수 있는 기능들의 다양한 조합‘으로, 즉 가능한 여러 삶들 중에서 선택할 자유를 반영하는 기능 벡터들의 집합으로 정의한다 (Sen 1992, p. 40). 유엔 개발 계획(이하 UNDP)은 이렇게 개인이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실질적 기회 집합, 현실에서 실제로 선택 가능한 기능 조합들의 집합을 통해 삶의 질을 측정해야 한다는 역량 접근을 수용해 지표 설계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들은 ’인간 발전(human development)’을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능·역량을 확장하는 과정“으로 정의하고 이 과정을 요약하고자 HDI(Human Development Index)라는 지표를 만들었다 (UNDP 1990, p. 10). 이때 HDI는 UNDP에 의해 인간 발전의 본질적인 기능들로 미리 지정된 세 가지 차원: (a) 긴·건강한 삶, (b) 지식, (c) 생활수준으로 구성된 리스트를 의미한다 (UNDP 1997, pp. 13-14). 이 글에서는 UNDP가 앞서 인간 발전을 사람들의 ”기능·역량을 확장하는 과정“이라 정의하고, 긴·건강한 삶·교육·생활수준을 그 필수 조건으로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이 세 차원을 HDI의 고정된 역량 리스트(또는 ‘HDI 리스트’)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때 UNDP가 인간 발전을 사람들의 “기능·역량을 확장하는 과정”이라 규범적으로 정의하고, (a) 긴·건강한 삶, (b) 지식, (c) 생활수준의 세 차원을 역량 확장의 본질적 조건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HDI 리스트는 모두 인간 발전에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 이로 인해 HDI의 고정된 역량 리스트의 각 차원이 인간 발전의 규범적 목표와 정합적으로 연결될 때에만 HDI는 ‘인간 발전 지표’로서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HDI의 고정된 리스트가 과연 Sen의 정의대로 개별 사회 구성원이 실질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기능들의 다양한 조합”을 확장시키는지에 대한 학술적 논쟁이 지속되어 왔다. 달리 말해, HDI 리스트가 ‘역량 확장’이라는 선언된 목적을 스스로 충족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HDI 리스트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역량 접근 내부에서 오랫동안 논쟁되어 온 쟁점이다.

우선 Sen은 역량 접근을 제시하면서도, 정책가나 이론가가 특정 기능들을 고정되고 최종적인 역량 리스트로 선결정하는 방식에 반대한다. 그는 ”하나의 고정되고 최종적인 리스트(grand mausoleum to one fixed and final list of capabilities)”에는 반대한다고 말한다 (Sen 2004, p. 80). 이는 고정 리스트가 개인이 가치 있다고 여길 수 있는 다양한 삶의 양식을 충분히 포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성취 가능한 기준의 조합을 제한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Nussbaum은 역량 목록(capabilities list)을 사회의 정치적 최소 기준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리스트를 옹호한다. Nussbaum은 목록이 시민에게 특정 기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의 선택에서도 필요한 최소한의 역량을 보장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라고 한다 (Nussbaum 2000, p. 148). UNDP 등의 국제기구 역시 Nussbaum의 입장에 가까워, HDI 리스트를 사람들의 선택을 넓히기 위한 필수 조건을 요약하는 도구로써 사용한다. 이러한 논리는 딜레마를 만들어내는데, (1) 리스트가 정당화 가능하다고 할 때, HDI는 ‘역량 확대’를 목표로 삼으면서도 정작 특정 기능들을 외부에서 고정함으로써 목표와 구조가 충돌하는 자기모순적 지표가 된다. (2) 반대로 리스트가 정당화 불가능하다고 할 경우, 공적 지표의 실용적인 장점들(비교 가능성, 단순성, 정책 실무 활용성 등)이 낮아지고, ‘측정 불가능한 좋은 이론’에 머무를 위험이 있다.

본 글은 이 중에서 (1)의 내부 모순 문제, 즉 HDI 리스트가 ‘역량 확장’이라는 자신의 규범적 목표와 충돌함을 보임으로써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논증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특히 위의 논쟁 중에서 HDI 리스트가 온정주의적(paternalistic)이기 때문에 정당하지 않다는 학계의 주장을 바탕으로 한다. 가령 Deneulin은 역량 접근을 실제 정책 및 평가 단계로 구현하는 순간, 역량의 구성 요소를 지정하게 되어 필연적으로 온정주의적이라 지적했다 (Deneulin 2002, p. 5). 기존 논쟁은 주로 ‘HDI 리스트가 필요한지 여부’에 대한 것으로, 리스트가 실제로 어떻게 역량을 축소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논의가 적었다. 본 글은 이 지점을 온정주의 개념을 통해 HDI 리스트가 역량 확장과 충돌할 수 있는 구조적 경로를 더 분명히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본 글은 HDI의 고정된 역량 리스트는 온정주의적이며, 따라서 ‘역량 확장’이라는 HDI의 선언된 목적을 스스로 충분히 충족시키지 못한다 는 것을 논증하고자 한다. 이 논제는 다음 세 개의 전제를 통해 연역적으로 도출된다. 논증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전제로 [1] 온정주의의 개념을 정의하고, 그 정의를 채택한 이유를 정당화한다. 두 번째 전제로 온정주의의 개념 정의를 바탕으로 [2] 온정주의가 “성취할 수 있는 기능들”의 집합을 축소함을 보인다. 그리고 세 번째 전제로 [3] HDI 리스트가 온정주의적임을 보인다. 두 번째 전제가 ’역량 확장‘ 목표를 달성하지 못함을 의미하므로 HDI 리스트는 선언된 목적을 스스로 충족시키지 못하게 된다.

2. 본론

1) 온정주의(paternalism)의 개념적 정의

HDI 리스트의 정당성 여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온정주의’의 개념을 정의해야 한다. 본 글에서는 Dworkin의 정의를 채택한다. Dworkin은 고전적 논문에서 온정주의를 “어떤 사람의 행위 자유에 대한 개입(interference with a person’s liberty of action)이, 오로지 그 사람의 복지, 선, 이익에 관한 이유만으로 정당화되는 경우”로 정의한다 (Dworkin 1972, p. 65). 이를 비교적 간단하게 정리하면 “(i) 어떤 사람 A가 다른 사람 S의 선택, 행동에 개입(interference)하며, (ii) 그 개입이 오직 S 자신의 선을 위한다(S’s own good)는 이유로 정당화될 때”라 할 수 있다 (VanDeVeer 1986, p. 12). 이때 ‘개입’에 있어서 드워킨은 “개인의 선택을 실제로 제한하거나 방향을 바꾸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Dworkin 1988, p. 24). 본 글은 이 두 가지 요소를 온정주의의 정의로 이해한다.

다른 온정주의의 정의가 아닌 Dworkin의 정의를 채택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이 정의는 단일 학자의 견해가 아니라 온정주의 연구에서 폭넓게 채택되는 최소 요건이다. 특히 역량 접근을 다루는 학자들이 대개 온정주의를 바로 이 두 핵심 요소로 정의한다는 점에서, 이 글의 정의 선택은 역량 접근의 문헌들 사이에서도 정당화된다. 가령 Claassen은 역량에 관해 논하며 온정주의에 대해 “국가가 개인(agent) 스스로의 결정에 개입(interfere)하는 것”이라 하며, “개인이 스스로 해를 끼치지 않도록” 국가가 권한으로 개인의 판단을 대체(overrule)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Claassen 2014, p. 58). 이는 앞서 제시한 두 가지 요소를 모두 포착한다. Qizilbash 역시 역량 접근에서 온정주의를 “사람들의 후생 증진을 위해 당사자들의 선택에 개입(interfere)하는 것”이라 하며, ‘후생 증진’을 선(good)으로 본다면 이 정의가 Dworkin의 온정주의 개념과 같다고 볼 수 있다 (Qizilbash 2012, p. 647). 즉, 역량 논의 내에서 Dworkin의 정의는 표준적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이 글의 목적은 온정주의 개념 전체를 재정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Sen이 정의한 역량 개념의 확장과 온정주의 개념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복잡한 동기 구조나 강제성 여부, 동의 여부 등의 확장된 조건들이 아니라, ‘(i) 제 3자의 개입이 존재하고, (ii) 그 개입이 개입의 대상을 위한다는 이유로 정당화된다’는 최소한의 정의 뿐이다. 앞서 역량 개념이 ‘한 사람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기능들’을 기준으로 구성됨을 보았다 (Sen 1992, p. 5). 그런데 온정주의에 대한 이 두 요소가 충족되는 순간, 앞서 정의에서 A로 표현된 제 3자가 필연적으로 S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치 있는’ 기능에 대한 판단을 대신하게 된다. 이는 달리 말해 정의상 A가 S의 선(good)을 대신 판단하고 그 판단을 근거로 S의 선택 구조를 대체(overrule)한다는 것이다. 즉, 두 요소만으로 역량 접근이 전제하는 개인의 판단 구조와 외부 개입의 구조가 서로 맞닿게 된다. 따라서 다음 절에서는 이러한 최소한의 온정주의 개념이 개인이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기능 조합, 즉 역량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논증한다.

2) 온정주의는 역량, 즉 “성취할 수 있는 기능들”의 집합을 축소한다

전제 2에서는 전제 1에서 정의된 온정주의의 개념이 역량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본다. 앞서 반복적으로 삶의 질이 역량, 즉 서로 다른 기능들을 어떤 방식으로 조합해 실질적으로 선택 및 성취할 수 있는가로 표현된다는 점을 언급했다. 본 절에서는 이렇게 개인(S)이 자신의 제도적, 사회적 환경에서 직접 선택 및 성취 가능할 수 있는 기능들의 조합을 C라는 집합으로 약칭한다.

온정주의는 Dworkin의 정의상 C의 기능들, 즉 개인의 특정 선택지들을 제한/배제하는 형태로 작용하는 ‘개입’을 통해 선택 구조를 재편하며((i) interference), 이를 당사자에게 해롭다는 이유로 정당화한다((ii) for S’s own good). 특정 생활 방식, 종교, 교육 선택, 건강 행태 등이 ‘좋지 않다’고 간주되어 제한되는 경우를 사례로 들 수 있다. 이러한 개입이 존재하는 경우, C에 포함된 일부 기능들은 선택이 불가능해지거나 실현 비용이 증가하게 된다. 그 결과, 기존의 C 내부에 있던 몇몇 기능 조합들은 더 이상 접근 가능한 조합에 포함되지 않게 되고, 제한된 조합들의 부분 집합이 새롭게 형성되게 된다. 이렇게 작아진 부분 집합을 C’라고 부를 때, 이는 명백히 C′ ⊂ C의 형태를 가지게 된다. 가령 정부가 개인의 건강에 해롭다는 이유로 설탕 음료 구매를 억제하는 정책을 도입할 경우, 특정 사람들에게는 설탕 음료 소비라는 기능의 실현 비용이 증가할 것이다. 이로 인해 음료의 접근성은 감소하고 그들은 음료 소비를 기존 조합에서 배제될 것이다. 이는 온정주의적 개입이 음료 소비를 포함한 기존의 C를 음료 소비가 포함되지 않은 C’이라는 더 작은 집합으로 축소시킴을 보여준다.1

이로써 온정주의는 특정 기능 조합을 ‘선’(good)에 부합한다고 제 3자가 판단해 개인의 역량을 재구성한다. 이 결과 C′ ⊂ C라는 축소 관계가 성립한다는 점은, 온정주의가 개인의 선택 환경 자체를 재구조화한다는 사실에서 직접 도출된다. 따라서 다음 전제에서는 이렇게 역량 축소를 야기하는 온정주의가 실제로 HDI의 고정된 역량 리스트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논증한다.

3) HDI의 고정된 역량 리스트는 온정주의적이다

전제 3에서는 전제 2에서 보인 역량 축소 효과를 실제로 HDI의 고정된 역량 리스트가 야기하는지를 논증하기 위해 이 리스트가 전제 1에서 정의한 온정주의의 두 요건을 충족하는지를 검토한다.

3-1) HDI 리스트는 개인의 선택에 대한 개입(interference)이다

전제 1에서 채택한 정의에 따르면, 온정주의적 개입의 첫 번째 요건은 어떤 행위자 A가 개인 S의 선택, 행동에 개입(interfere)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개입은 정의 상 반드시 법적 강제나 물리적 제한일 필요가 없다. 앞서 보았듯 Dworkin은 개입에 대해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거나 바꾸는 행위로만 정의했기 때문이다. Claassen은 가치 있는 기능에 대한 선택이 이루어지는 판단 구조를 외부 기준으로 대체(overrule)하는 경우 역시 간섭으로 본다고 한다 (Claassen 2014, p 71). HDI 리스트는 다음 두 단계에서 이러한 개입 요건을 개념적으로 충족한다.

첫째, HDI 리스트를 이루는 세 차원은 제 3자에 의해 선결정되었다. 즉, 제 3자에 의해 역량에 대한 평가의 틀 자체가 결정되고 있다. UNDP는 긴·건강한 삶, 지식, 생활 수준을 “모든 발전 단계에서 본질적(essential)인 선택들“로 선언하고 역량을 이루는 요소를 이 세 기능으로 고정한다 (UNDP 1997, pp. 13-14). 이는 역량에 대한 개념적, 규범적 판단 권한이 개인의 내적 가치 판단이 아니라 UNDP와 전문가들이라는 외부 주체가 미리 정한 기준으로 이전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계에서 이미 개인이 가치 있다고 여길 수 있는 다른 기능들은 인간 발전 논의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둘째, 이로 인해 개인의 평가 권한이 제도적, 구조적으로 대체된다. 즉, 이미 존재하는 개인의 판단을 무력화하는 결과가 발생한다. Claassen이 지적하듯, 권위 있는 기관 및 국가 등이 특정 기능만을 역량의 구성 요소라고 규정하면 개인이 그 기능을 자신의 삶에서 가치 있지 않다고 판단하더라도 그 판단은 공적 평가 및 정책 차원에서 구조적으로 압도되거나 무시된다 (Claassen 2014, p. 16). 앞서 평가의 틀이 외부에서 설정됨을 보였는데, 이로 인해 개인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특정 기능이 그 틀에 위치한다면 기능에 대한 개인의 판단이 평가적으로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개인이 어떤 기능을 가치 있다고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HDI 리스트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 기능은 평가의 구성 요소가 아니기에 인간 발전 판단에서 의미 있는 항목으로 고려되지 않는다. 즉, 개인의 판단이 법적으로 억압되거나 강제되지 않더라도 이는 개념적 구조상 공적 기준 아래에 종속되게 돼 평가 구조 안에서 더 이상 유효하게 기능하지 못한다. 개인의 내적 판단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인간 발전을 평가하는 공적 기준이 개인의 가치 판단과 무관하게 외부에서 설정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기능에 대한 개인의 선택은 제한되고, 이는 Dworkin이 정의한 개입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HDI 리스트를 개입으로 해석하는 데 이견이 존재한다. 앞서 Dworkin이 개입을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거나 방향을 바꾸는 것이라 정의했는데, HDI의 리스트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HDI는 단지 각 국가의 평균 수명, 교육와 소득 수준을 요약한 통계 지표일뿐, 사람들의 개별 선택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HDI는 삶의 질을 평가해 국가들을 비교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지, HDI가 있다고 해서 어떤 개인이 특정 생활 방식, 종교,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제한되거나 사람들의 선택이 직접적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실제 WHO도 웹사이트에 HDI를 “정책 결정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인간의 역량으로 기존 경제학 통계의 초점을 이동시키기 위한” 지표로,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 의문을 품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소개한다 (WHO, n.d.).

이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는 HDI 리스트와는 구분되지만 유사하게 역량의 구성 요소를 정하고 리스트로 만든 Nussbaum이다. Nussbaum은 이러한 고정된 ‘역량 목록(a list of the central capabilities)’이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 어떤 기능(functioning)을 선택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최소 수준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Nussbaum 2000, p. 75). 그녀는 또한 결국 고정된 역량 리스트가 있더라도 실제 어떤 삶을 선택할지는 시민의 몫이라고 한다 (Nussbaum 2000, p. 148). 이에 의하면 HDI는 특정 기능에 대한 개별적 선택을 제한하거나 바꾸지 않기 때문에 Dworkin이 말하는 ‘개입’으로 볼 수 없게 된다.

이 반론은 표면적으로 타당해 보여도 전제 3-1를 무효화시킬 수 없다. HDI가 법적 강제나 물리적 제한과 같은 직접적 간섭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HDI의 리스트가 개인의 기능 집합(C)을 제한하고 바꾼 것을 개념적, 구조적 수준에서 보인 바 있고, 이 간섭은 HDI의 실제 사용 맥락에서도 그대로 구현된다. 즉, 반론은 개입(interference)과 법적 강제(coercion)를 사실상 동일시하고 있다. 하지만 Dworkin의 개념적 틀에서 개입은 강제보다 넓은 범주이며, 법적 강제나 물리적 제한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제도적, 평가적 구조로써 개인의 기능 집합을 재편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HDI는 정책, 예산, 국제 원조의 결정 과정에서 핵심 기준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실질적 선택 환경의 재편이라는 실증적 효과를 야기하며, 그 점에서 이는 ‘개입’이라 볼 수 있다.

HDI가 어떤 기능들을 역량의 핵심 요소로 고정하면, 이는 정책과 예산 배분이 자연스럽게 그 기능들을 중심으로 재편되도록 하는 유인으로 작용한다. 앞서 보았듯 HDI 리스트에 포함된 세 차원은 국제 기구, 국가, 개발 프로젝트, 원조 기관 등이 따라야 하는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며, 돌봄·정치적 참여·관계적 삶·문화 활동 등 다른 기능들은 평가와 정책 논의에서 주변화된다. Sagar & Najam은 HDI 점수, 순위가 국제 기구와 원조 기관의 우선 순위 설정에 사용되며, 정부가 어떤 기능들을 ‘정책적으로 중요한’ 역량으로 취급할지와 관련해 강한 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Sagar & Najam 1998, pp. 249-250). 그리고 이로 인해 실제 정책 변화를 촉발한 사례도 존재한다. 예컨대 기니나 이집트에서 HDI가 낮게 나오자 총리와 장관이 소녀들의 교육과 기초 교육 확대 정책을 내놓은 사례가 보고된다 (Fukuda-Parr 2013, p. 7). 이 정책은 기존에 교육을 받지 않았을 선택을 바꾸었으며, 한정된 예산을 가정했을 때 다른 기능들의 실현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축소시켰다는 측면에서 개입으로 볼 수 있다. 즉, WHO의 HDI 설명 페이지에도 HDI가 정책 결정 도구라고 공식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만큼, HDI 리스트에 포함된 세 차원은 실현 가능성이 높아지고, 포함되지 않은 기능들은 상대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줄어들며 선택 가능성이 제한된다. 따라서 HDI 리스트는 개념적 수준에서 뿐만 아니라 실천적 맥락에서도 ‘개입’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2) HDI 리스트는 ‘개입 대상자의 선을 위함(for S’s own good)’이라는 정당화 이유를 갖는다

전제 1에서 온정주의의 두 번째 요건은 개입 당사자에게 좋다는 것을 근거로 제 3자가 개입을 정당화하는지 여부였다. HDI 리스트는 이 요건을 충족한다. 앞서 언급했듯 UNDP는 처음부터 인간 발전에 대해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고 실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능 조합을 확장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또한 HDI 리스트의 세 차원을 역량을 넓히는 데 필수적인 것들로 규정하고 이 기준에 따라 정책과 성과를 평가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Deneulin은 바로 이런 지표 구현(implementation) 단계에서의 ’기준 지정’이 역량 접근을 온정주의적으로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녀는 국제 기구와 정부가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맥락과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특정 기능들을 정책 목표로 삼는 순간, 그 기능들이 그 사람에게 좋다는 판단을 전제”한다고 한다 (Deneulin 2002, p. 5). 즉, HDI 리스트는 각 개인의 선(good)으로 볼 수 있는 ‘질 좋은 삶’을 위해 고정 역량 리스트를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온정주의의 두 번째 요소를 충족한다.

따라서 HDI의 고정된 역량 리스트는 전제 1의 온정주의의 두 가지 요건을 모두 만족하기에 온정주의적 개입이며, 그 결과 전제 2에 의해 역량을 넓힌다는 HDI의 선언된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3. 결론

본 글은 Sen의 역량 접근과 이를 지표로 구현한 HDI 사이의 관계를, 특히 HDI의 고정된 역량 리스트가 갖는 온정주의적 성격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HDI 리스트, 즉 세 차원이 실제로 역량을 확장시키는지를 기준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글의 출발점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본론에서는 첫째, Dworkin의 정의의 표준적 사용례를 따라 온정주의를 두 가지 요건으로 정의했다. 둘째, Sen이 정의한 역량 개념을 이용해 온정주의가 개인이 실제로 실천할 수 있는 기능 조합들의 집합을 더 작은 부분집합으로 축소시킨다는 점을 보였다. 온정주의적 개입으로 인해 개인의 선택 가능한 기능이 제한/배제되면, 그 기능은 더 이상 실천 가능한 선택지로 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셋째, HDI 리스트가 온정주의의 두 가지 요건에 모두 해당됨을 논증했다. 역량의 요소를 개인이 아닌 UNDP/전문가가 선결정하고, 그 기준을 통해 정책, 예산, 원조 등의 우선순위를 구조화하며 사실상 특정 기능을 배제하기에 리스트는 ‘개입’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이 과정 전체가 각 개인의 선을 위한다는 논리에 의해 정당화되기에 두 번째 요건 역시 충족했다. 따라서 HDI 리스트는 온정주의적이고, 역량을 축소시킨다는 점에서 선언된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이 논증은 Sen과 Nussbaum, UNDP 사이의 오래된 논쟁적 구조를 재조명한다. Sen은 고정되고 최종적인 리스트에 대한 반감을 표했으나 이에 대해 명시적으로 온정주의로 개념화한 적이 없다. 본 글은 Sen의 직관을 ‘리스트가 역량 축소를 야기한다’는 논리적 형식으로 재구조화하고, Nussbaum의 역량 목록 옹호가 실제로 역량 확대를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 근거를 제공했다. 또한, 이 글은 역량 접근의 온정주의 위험을 지적한 Deneulin와 Claassen의 선행 연구와 연결되지만, 온정주의 개념을 HDI 리스트에 직접 적용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다만 HDI 리스트가 온정주의적임을 밝히는 과정에서 실제 정책 및 예산 배분 효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증적으로 분석하지는 않고, 메타 분석에 그친 것은 본 글의 한계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논증은 서론에서 제기한 딜레마((1) 정당성과 (2) 실용성 간의 충돌) 가운데 정당성 판단만을 중심으로 HDI 리스트를 재검토했다. 리스트를 약화 또는 폐기할 경우의 실용성, 정책 활용성 문제는 이 글이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이는 향후 연구로 남긴다. 즉, 역량 접근 자체를 부정하거나, HDI의 대안 지표 설계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본 글은 우선 정당성의 내부 모순을 논증함으로써, HDI 리스트를 역량 기반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 결과로 남은 정당성과 실용성 사이의 대립(trade-off)을 명확히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달리 말해 본 논증은 정당성을 유지하려면 현재 방식의 HDI 리스트 정당화는 포기해야 하고, 실용성을 유지하려면 역량 접근이라는 규범적 배경을 약화시키거나 리스트를 만드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이론적으로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이론적 기여를 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글은 HDI 리스트의 철학적 정당성 구조를 재규정하는 토대를 제공하며, 향후 실증적 연구들이 이 틀을 확장할 수 있다.

참고문헌

외국 문헌

Alkire, S. (2010). Human development: Definitions, critiques, and related concepts (Human Development Research Paper No. 2010/01).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Claassen, R. (2014). Capability paternalism. Economics and Philosophy, 30(1), 57–73.

Deneulin, S. (2002). Perfectionism, paternalism and liberalism in Sen and Nussbaum’s capability approach. Review of Political Economy, 14(4), 497–518.

Dworkin, G. (1972). Paternalism. The Monist, 56(1), 64–84.

Dworkin, G. (1988). The theory and practice of autonomy. Cambridge University Press.

Fukuda-Parr, S. (2003). The human development paradigm: Operationalizing Sen’s ideas on capabilities. Feminist Economics, 9(2–3), 301–317.

Fukuda-Parr, S. (2013). Global development goal setting as a policy tool for global governance: Intended and unintended consequences (IPC-IG Working Paper No. 108). International Policy Centre for Inclusive Growth.

Nussbaum, M. C. (2000). Women and human development: The capabilities approach. Cambridge University Press.

Qizilbash, M. (2012). Informed desire and the ambitions of libertarian paternalism. Social Choice and Welfare, 38(4), 647–658.

Robeyns, I. (2005). The capability approach: A theoretical survey. Journal of Human Development, 6(1), 93–117.

Sagar, A. D., & Najam, A. (1998). The human development index: A critical review. Ecological Economics, 25(3), 249–264.

Sen, A. (1992). Inequality reexamined. Harvard University Press.

Sen, A. (2004). Capabilities, lists, and public reason: Continuing the conversation. Feminist Economics, 10(3), 77–80.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1990). Human development report 1990: Concept and measurement of human development. Oxford University Press.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1997). Human development report 1997: Human development to eradicate poverty. Oxford University Press.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n.d.). Human development index (HDI). Human Development Reports. Retrieved November 20, 2025, from http://hdr.undp.org/en/composite/HDI

VanDeVeer, D. (1986). Paternalistic interven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World Health Organization. (n.d.). UNDP human development index (HDI). European Health Information Gateway. Retrieved November 20, 2025, from https://gateway.euro.who.int/en/hfa-explorer/hdi/

  1. 주의할 점은, 반대로 특정 선택지들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하더라도 본 글이 주장하는 C′ ⊂ C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는 점이다. C는 단일 기능의 크기가 아니라 가능한 기능들의 전체 조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령 기능 A(A ∈ C)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하는 정책이 실행된다고 하자. A가 교육일 경우 의무 교육 연령을 높이는 것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이 경우 정부의 정책은 사람들의 선택 구조를 재편하여 기존 기능 조합 중 일부를 배제하거나 실현 비용을 증가시키게 된다. 사례를 바탕으로 보면 교육을 추가적으로 받게 되면 삶의 질을 높이는 다른 기능들, 예를 들어 경제 활동이나 문화 생활을 할 수 없다. 즉 포기해야 하는 기능들의 기회비용이 발생한다. 따라서 A 자체가 확장되더라도 개입으로 인해 선택 가능한 조합들의 전체 집합은 축소되고(C’), 이 점에서 C′ ⊂ C 관계가 성립함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