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 과제-08 기말과제 초고 작성하기 011-22 류혜림

제목: 경험에 근거한 정치는 변화를 위한 힘을 가지고 있을까: 정체성 정치의 딜레마

서론: 왜 지금 경험을 다시 주목하는가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는 오늘날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한국의 온라인 기사나 칼럼에서 이 용어는 종종 “자기 정체성만 앞세우는 이기적인 정치”, “피해의식에 기대는 정치”와 같은 부정적 뉘앙스로 쓰이고는 한다. 이는 타국 언론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좁은 의미의 정치 진영에서 “백인 노동계급의 분노를 외면한 채, 소수자 집단의 요구만 챙기는 민주당의 정체성 정치”라는 진단이 반복된다.1 이런 맥락에서 정체성 정치는 “국민 통합을 해치는 이해집단 정치”, 혹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검열 문화”의 다른 이름으로 수용된다.

흥미로운 것은 학계 내부에서도 “정체성 정치”라는 표현을 스스로 긍정적으로 쓰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체성 정치”는 68혁명이라는 기존 냉전체제 아래 일어난 광범위한 민중, 반전, 인권 운동 와중 특정 ‘집단’에 대한 억압이 부각되며 사용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학계에는 1970년대 후반 즈음하여 등장했다. 페미니즘, 흑인 해방, 퀴어 정치, 장애에 관한 담론은 물론 활발하지만, 담론을 주도하는 학자나 운동가들이 본인을 “정체성 정치의 옹호자”라고 지칭하지는 않는다. 정체성 정치는 자유주의의 적이기도, 혹은 자유주의를 위한 한 흐름이기도, 또 다른 이들에게는 이미 “엘리트 포획”이 되어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로 이해된다.

이 혼란 속에서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많은 학자가 정체성 정치에 다양한 정의를 내리지만, 대체로 정체성 정치를 특정 집단의 “살아온 경험”을 정치의 출발점으로 삼는 실천으로 정리한다는 점이다.2 여성으로, 흑인으로, 성소수자로, 혹은 장애인으로 살아오며 겪은 경험을 나누고, 그 경험에서 출발해 불평등한 구조를 비판하는 방식이 정체성 정치의 핵심이라는 인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체성 정치는 단지 “나와 같은 사람들끼리 뭉치는” 이해관계의 정치가 아니라, 특정한 위치에서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이 그 경험을 근거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론적·정치적 요구를 동시에 담고 있다.3 이 지점에서 한가지 딜레마를 찾을 수 있다. 혹자는 정체성 정치가 내포한 경험의 힘을 정치의 강력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패트리샤 힐 콜린스는 흑인 여성들의 경험이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교차하는 자리에서만 보이는 구조적 폭력”을 드러낸다고 말한다(Collins 2000, p. 179). 이들이 공유하는 경험은 기존의 추상적 이론이 보지 못했던 현실을 포착하게 하며, 바로 그 점에서 정치적 비판의 중요한 자원처럼 보인다. 소니아 크룩스 역시, 포스트구조주의 이후 페미니즘 이론이 경험을 지나치게 의심한 나머지, 억압받는 이들이 자신들의 경험에서 출발해 말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잃었다고 비판하며 “경험의 회수”를 주장하기도 한다(Kruks 2001, ch. 1-2).

다른 한편에서는, 바로 이 경험 중심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조앤 스콧은 “경험의 증거”라는 표현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경험은 언제나 이미 어떤 담론 속에서 해석된 것이며, “날것의 경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Scott 1991, 779). 단순히 “나는 이렇게 경험했다”고 말하는 방식은, 경험을 둘러싼 권력 관계와 언어 구조를 보이지 않게 만들고, 오히려 기존 범주를 강화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의 경험”을 그대로 기초로 삼는다고 할 때, 그 범주 안에서 누구의 경험이 “대표적인 여성의 경험”이 되고, 누구의 경험은 주변으로 밀려나는지 묻지 않는다면, 결국 이미 특권화된 일부 경험이 다시 전체를 대신 말하게 될 위험이 있다. 이에 정체성 정치가 가지는 문제를 다음과 같은 양자의 딜레마로 요약해보고자 한다. 우선, 억압받는 집단의 경험을 정치적 정당성의 특권적 근거로 삼으면, 특정 정체성 범주가 굳어지고, “누가 말할 자격이 있는가”를 둘러싼 경계 짓기와 내부 규율이 강화되며, 교차적 위치에 있는 이들의 경험은 다시 지워질 위험이 있다.4 그러나 동시에 경험의 불투명성과 구성성을 강조하며 경험을 적극적으로 해체해 버릴 경우, 정작 그 경험이 가리키던 억압의 현실성이 추상적 담론 속에서 다시 사라진다. 성차별·인종차별·계급 폭력에 대한 구체적 서사가 “어차피 모두 해석의 산물일 뿐”이라는 말 속에서 다시 희미해질 수 있다.

본고는 이 딜레마의 한 측, 경험을 정치의 정당화 자원으로 삼는 입장(A), 즉 경험 근거주의에 가까운 방향을 옹호하되, 그것이 정체성 범주를 고정된 것으로 만드는 본질주의5와 “누가 말할 권리를 갖는가”를 따지는 입장 인식론6으로 곧바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떤 논리적 조건이 필요한지를 연역적 논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핵심 논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경험은 언제나 해석을 통해서만 주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압의 현실성을 지우지는 않는다.
  2. 따라서 정치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을 특정한 방식으로 함께 이야기하고, 공유하고, 이론화하는 실천이다.
  3. 그런데 경험 해체의 입장(B) 역시 억압 구조를 비판하기 위해, 결국 억압 경험에 대한 서사와 증언을 인식의 자원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으므로, (1)과 (2)를 받아들이는 한, 이런 실천의 정당화 가능성을 원리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정리하면, “모든 경험은 해석되어 있다”는 통찰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로부터 곧바로 “경험은 정치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따라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경험을 둘러싼 집단적 서사화·공유·비판의 실천이 어떤 기준을 충족할 때, 그것이 정체성 정치의 정당한 토대가 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후 본론에서는 먼저 이 딜레마의 양쪽을 각각 옹호하는 대표적 논의를 살펴보고, 이어서 위의 세 단계를 연역적 구조로 풀어낸 뒤, 마지막으로 이 논리 구조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예상 반론과 그에 대한 재반박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론

­­경험, 해석, 그리고 실천

경험 근거주의와 경험 해체의 문제

먼저, 경험을 정치의 핵심 근거로 다시 회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자. 크룩스에게서 핵심 문제의식은 비교적 분명하다. 페미니즘을 비롯한 해방 운동은 원래 “여성으로, 흑인으로, 혹은 장애인으로 살아온 경험”에서 출발해 세계를 비판해 왔다. 그런데 포스트구조주의 이후, 경험은 ‘본질주의적’이고 ‘순진한’ 것이라는 이유로 철학적으로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정체성 정치는 자신을 낳았던 토대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했다(Kruks 2001, ch. 1-2). 크룩스가 말하는 “경험의 회수”는, 경험을 다시 순수한 토대나 “완전히 투명한 진실”로 돌려놓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경험이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서 형성된 주관적·역사적 사건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억압 구조에 대한 특별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흑인 여성들의 일상 경험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교차하는 구조를 “한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자리”에서 나온다. 콜린스가 말하듯, 이들은 “지배 행위가 서로 교차하는 위치에서 세계를 본다.”(Collins 2000, p. 172). 이 위치를 무시한 채 “추상적 개인”만을 상정하는 이론은, 현실의 폭력을 보지 못한다.

이에 비해 스콧은, 경험을 이런 방식으로 기초로 삼으려는 시도 전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녀에게서 문제는, 경험이 아니라 “경험을 다루는 방식”이다. 스콧이 보기에 많은 역사·이론 텍스트에서 경험은 “더 이상 설명될 필요가 없는 최종적인 증거”처럼 취급된다(Scott 1991, p. 783). 누군가 “나는 여성으로서 이렇게 경험한다”고 말할 때, 그 말은 곧바로 “여성의 본질”을 증명하는 사례로 사용되곤 한다. 어떤 역사 기록에서 “노동자의 경험”이 단일하고 안정적인 무엇으로 이야기될 때, 그 안의 젠더·인종·국적 차이는 사라진다. 그래서 스콧은 경험을 기초로 삼기보다,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범주와 담론의 역사를 질문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어떤 언어와 제도 속에서, 무엇을 경험이라고 부르게 되었는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보면 “여성의 경험”이나 “흑인의 경험”은 이미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범주를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경험에 특권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전략이, 오히려 기존 범주를 재강화할 수도 있다.

이 두 입장은 모두 정체성 정치가 실제로 겪어 온 문제를 둘러싸고 있다. 경험을 정치의 핵심 근거로 삼으면, 정체성 범주의 고정화와 입장 인식론의 위험이 생긴다. 누가 “진짜 여성”이고, 누가 “진짜 흑인”이고, 누가 “진짜 장애 경험”을 가졌는지에 대한 경계가 내부에서 만들어지고, 그 경계에서 밀려난 이들은 다시 침묵한다. 동시에, 경험을 일관되게 의심하기만 하면, 우리가 비판하고자 했던 억압의 현실이 다시 이론 속에서 녹아 사라진다. 정리하면, 정체성 정치의 딜레마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A(경험 근거주의): 억압받는 집단의 경험을 정치적 정당성의 핵심 근거로 삼는다. 이 경우 정체성 범주가 고정되고, 내부에서 “누가 말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규율과 배제가 강화될 위험이 있다. B(경험 해체): 경험의 구성성과 불투명성을 강조하며, 경험을 기초로 삼는 전략 전체를 의심한다. 이 경우, 정작 억압의 현실성에 대한 서사가 추상적 담론 속에서 다시 사라질 위험이 있다. 이제 나는 이 둘 중에서 A의 방향, 즉 경험을 정치의 정당화 자원으로 삼는 방향을 옹호하되, 그 옹호가 B가 제기한 비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수용하고 수정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경험은 해석되어 있지만, 억압의 현실을 지운다고 볼 수는 없다

먼저 “경험은 항상 해석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통찰을 전제로 삼자. 이 점에서 나는 스콧의 비판을 상당 부분 수용한다. 여성·흑인·장애인의 경험은 이미 특정한 언어, 범주, 제도 속에서 형성되고, 말해지고, 기록된다. “나는 이렇게 경험했다”는 말 자체도, 이미 어떤 이야기 방식과 정치적 문법을 배운 이후에야 가능하다. 따라서 경험이 곧바로,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기초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 곧장 “경험은 정치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어떤 해석이 어떤 경험을 보이게 하고, 또 어떤 경험을 보이지 않게 하는가이다. 예를 들어, 흑인 여성 대학생들의 정체성 발달 과정을 탐구한 크리스타 포터의 연구는, 이들이 백인 중심 대학 공간에서 겪는 인종차별·성차별 경험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 공간의 구조와 규범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정교한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Porter 2013, p. 28). 이때 경험은 이미 해석을 포함하지만, 바로 그 해석을 통해 억압 구조의 특정한 측면이 드러난다.

정리하면, 경험이 해석적이라는 사실은, 경험이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라, 경험이 이미 현실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은 “경험이 해석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경험 설명이 억압의 구조를 더 잘 포착하느냐”로 옮겨가야 한다. 이 점에서, 경험 자체를 전면 부정하는 것보다는, 경험에 담긴 해석을 더 잘 만들고, 그 해석이 어떤 구조를 비추는지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당화되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을 공유·이야기·이론화하는 실천이다.

정치적으로 정당화해야 하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을 다루는 방식, 다시 말해 경험을 특정한 방식으로 공유하고, 이야기하고, 이론화하는 집단적 실천이다. 크룩스가 말하는 “경험의 회수”도, 자세히 보면 어떤 고정된 “경험 그 자체”를 기초로 삼자는 주장이 아니다. 그는 의식화 모임 같은 공간에서 여성들이 서로의 경험을 나누면서, 처음에는 개인적 불만처럼 느껴졌던 사건들이 점차 구조적 성차별의 패턴으로 인식되는 과정을 강조한다(Kruks 2001, ch. 1-2). 경험은 처음부터 정치적 인식이 아니라, 함께 이야기하는 과정 속에서 정치적 지식으로 다시 구성된다.

포터가 흑인 여성 대학생들의 정체성 발달을 분석하면서 강조하는 것도, 개별적인 일화 하나하나가 아니라, 그 일화들을 서로 나누고 언어화하는 과정이다. 그는 흑인 여성 학생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백인 중심 규범이 “정상”으로 상정된 캠퍼스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함께 해석해 나가면서, 자신들의 경험을 “문제 있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 있는 구조”의 증거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런 사례들을 묶어 말하면, 정치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실천이다. 즉, “어떤 경험이 중요한지 선택하고, 그 경험을 어떤 언어로 말할지 결정하며,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연결해 구조적 그림을 그려 나가는 집단적 작업.”인 것이다. 다시 말해, 경험은 그대로정치의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된 경험 서사가 정치적 인식의 기초가 된다. 이때 재구성은 단지 “조금 더 세련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둘러싼 기존 담론을 비틀어 새 의미를 만드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장애를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장벽의 문제로 재해석하는 장애학의 논의는, 장애인의 경험을 그대로 “사실”로 받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지배적인 의료 모델을 비판하는 새로운 이론을 만든다.7

정리하면, 경험 근거주의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경험이니까 맞다”는 식의 주장이 아니라, “이러한 방식으로 조직되고 재구성된 경험 서사가, 억압 구조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다른 설명보다 설득력이 있다”는 형태를 가져야 한다. 정치적으로 옹호해야 하는 것은 경험이 아니라, 경험을 다루는 특정한 실천 형태이다.

경험 해체의 입장은 경험 실천의 정당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두 전제를 다시 정리해 보자. (전제 1) 경험은 언제나 해석적이지만, 그럼에도 억압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다. (전제 2) 정치적으로 정당화해야 하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을 공유·이야기·이론화하는 집단적 실천이다.

여기서 본고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결론) 경험을 전면적으로 해체하는 입장도, 스스로의 비판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결국 어떤 형태로든 이런 집단적 경험 실천을 인식의 자원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실천의 정당화 가능성을 원리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자기모순에 빠진다.

스콧의 논문을 포함해, 경험 해체의 입장은 “누가 어떤 담론 속에서 경험을 말할 수 있게 되는가”를 묻자는 제안을 한다. 그런데 이런 질문 자체가 가능하려면, 누군가가 “나는 이런 방식으로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믿어지지 않았다”고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크리스티 돗슨이 말하는 “인식론적 억압” 개념도 마찬가지다. 그는 특정 집단이 구조적으로 말할 기회를 박탈당하거나, 말을 해도 신뢰받지 못하는 상황을 “인식론적 억압”이라고 부른다.8 그런데 이런 억압을 분석하려면, 바로 그 침묵과 왜곡을 겪은 이들의 경험 서사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경험 해체의 입장은 이 서사들을 어떤 방식으로사용하고 있는가? 두 가지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가능성 1: 경험 서사를 단지 분석의 재료로만 사용한다우선, 경험 서사는 “담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 주는 예시일 뿐, 그 자체로 억압의 현실을 증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흑인 여성이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은 그저 “흑인 여성이라는 범주가 이런 식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보여 주는 자료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입장에는 한 가지 지적할 문제가 존재한다. 만약 경험 서사가 억압의 현실을 증언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애초에 무엇이 억압인지어떻게 알 수 있는가? 스콧이 “여성이라는 범주가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말할 때, 그 범주가 억압적이라는 판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 판단은 결국, “여성으로 살면서 겪은 경험들”이 단지 중립적인 사회적 범주화가 아니라, 폭력적이고 불평등한 구조였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그런데 이 인식은 바로 여성들의 경험 서사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 경험 서사를 “단지 재료”로만 취급하려는 시도는, 결국 그 재료가 무엇을 증언하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범주가 억압적이라는 판단 자체가, 이미 그 범주 안에서 살아온 이들의 경험적 증언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가능성 2: 경험 서사를 억압의 현실을 가리키는 증거로 인정한다이 경우 경험 해체의 입장은 사실상 (전제 1)과 (전제 2)를 받아들이는 셈이다. 경험은 해석적이지만, 그 해석된 경험이 억압의 현실을 드러낸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입장은 더 이상 “경험을 정치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 경험을 다루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해야 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연역 구조가 성립한다.

  1. 경험 해체의 입장(B)은 억압의 구조를 비판하기 위해 억압 경험의 서사를 인식의 자원으로 사용해야 한다.
  2. 그런데 이 서사를 “단지 재료”로만 취급하면, 무엇이 억압인지 판단할 기준을 잃는다. (즉, 가능성 1)
  3. 반대로 이 서사가 억압의 현실을 증언한다고 인정하면, 경험 실천의 정당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능성 2)
  4. 따라서 B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최소한 (가능성 2)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 모순을 피하려면, B의 입장도 결국 다음과 같은 최소한의 명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적어도 어떤 방식으로 조직·재구성된 경험 서사는, 억압 구조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다른 자료보다 우선적인 증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우선적인 증거 역할”은 거창한 철학 용어가 아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 경험 서사가 없으면 애초에 문제를 정의할 수조차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A의 경험 근거주의는 B에게 논리적으로 요구되는 최소한의 양보로서 정당화된다. 경험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근거는 아니지만, 억압 구조를 비판하는 이론이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떤 형태로든 경험 실천에 제한적이지만 필수적인 우선권을 인정해야 한다. 즉 전제 1과 전제 2를 함께 받아들이는 순간, 경험 해체의 입장도 경험 근거주의의 변형된 형태-경험이 아니라, 경험을 다루는 실천의 정당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게 됨을 말하며 논증을 마치고자 한다.

결국 다시 경험을 특권화하는 것 아닌가?

다만 이러한 논증에 대해 경험 해체의 입장에 대해 혹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당신의 논증은 겉으로는 경험의 해석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특정 방식으로 조직된 경험 서사’에 다시 특권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 서사를 분석에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경험은 어디까지나 예시나 자료일 뿐, 정당화의 핵심은 여전히 담론 분석과 구조 비판에 있다.”는 비판, 즉 필자는 ‘분석에의 사용’과 ‘정당화의 근거’를 동일시한다는 비판이다.

이 반론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문제 제기를 담고 있다. 하나는, 경험을 분석에 사용한다고 해서 곧바로 그 경험이 정치적 정당성의 규범적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정당화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정체성 정치의 방향이 크게 달라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반론은 경험을 “자료”로만 간주하고, 그 자료의 위치를 과소평가한다는 점에서 논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흑인 여성의 대학 경험을 연구하는 포터는, 이들의 서사가 단일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대학이라는 제도가 상정하는 ‘정상적인 학생상’과 계속해서 충돌하는 과정이라고 지적한다. 이 서사는 그 자체가 이미,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이론적 진술에 가깝다. 이때 경험 서사는 “자료”이면서 동시에 “이론의 일부”이다.

또한 돗슨이 말하는 인식론적 억압 개념은, 누가 지식 생산의 주체로 인정받는지에 대한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누군가의 경험 서사가 계속해서 무시되거나 왜곡된다면 이는 단순히 “자료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아니라, 특정 집단이 지식의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정치적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경험은 자료일 뿐, 정당화의 근거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지식-정치의 비대칭을 가리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정리하면 본고의 주장은 다음 두 가지를 구분한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첫째, 경험은 해석될 필요 없는 최종적 기초이며, 경험을 말하는 사람은 그 내용에 대해 비판에서 면제된다. 둘째, 경험은 해석적이고 비판 가능하지만, 억압 구조에 대한 인식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재구성된 경험 서사가 특수한 지위, 즉 없어서는 안 되는 출발점의 지위를 가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글이 옹호하는 것은 양자 중 후자에 해당한다. 경험 서사가 언제나 비판과 재구성의 대상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서사 없이는 아예 문제를 정의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장애,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 등에서의 구조적 폭력은, 그 구조가 몸과 삶에 남기는 흔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이때 그 흔적을 말하고 공유하는 실천은, 단순한 예시가 아니라, 비판 이론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 된다.

따라서 “당신은 경험을 다시 특권화하고 있을 뿐”이라는 반론은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그 특권이 어떤 의미의 특권인지 충분히 구분하지 못한다. 이 글이 제안하는 것은 경험의 무비판적 특권이 아니라, 비판 가능하지만 필수적인 출발점으로서의 특권이다. 경험 해체의 입장 역시, 자신의 비판이 현실의 억압에 닿기를 원한다면, 이 정도의 특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 비판은 결국 아무도 살지 않는 추상적 공간에서만 유효한 논쟁으로 그칠 것이다.

결론

본론에서는 정체성 정치를 둘러싼 한 가지 딜레마 ― 경험 근거주의와 경험 해체 사이의 긴장 ― 를 붙들고 그 중에서도 경험을 정치의 정당화 자원으로 삼는 방향을 옹호할 수 있는지 논증했다.

먼저, 정체성 정치는 억압받는 집단의 “살아온 경험”을 정치의 출발점으로 삼는 실천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이해관계 정치와 구별된다는 점을 확인했다. 크룩스와 콜린스의 논의를 통해 경험이 단지 개인적 감상이 아니라, 특정 사회적 위치에서만 보이는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인식의 토대가 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동시에 스콧과 돗슨의 비판을 통해 경험을 해석 없이 “증거”로 사용하는 방식이 정체성 범주를 고정하고, 입장 인식론과 인식론적 억압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을 또한 인정했다. 이 딜레마 속에 본고는 두 가지 전제를 세웠다. (1) 경험은 항상 해석적이지만, 그럼에도 억압의 현실성을 지우지 않는다. (2) 따라서 정치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을 함께 이야기·공유·이론화하는 집단적 실천이다. 그리고 이 두 전제를 받아들이는 순간, 경험 해체의 입장도 결국 어떤 형태로든 경험 실천을 인식의 자원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 실천의 정당화 가능성을 원리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경험 근거주의와 경험 해체의 딜레마 사이에서, 후자를 부정한 것이다. 비판 이론이 억압의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현실을 겪은 이들의 경험 서사를 필연적으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경험을 해석적이고 비판 가능한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비판의 불가피한 출발점으로서 제한된 특권을 부여하는 약한 경험 근거주의는, 정체성 정치의 딜레마를 통과하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

이 결론은 정체성 정치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여전히 정체성 범주의 내부 권력 구조, 교차성의 문제, “누가 말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갈등은 “꾸준히 제기되어야 할 질문”으로 남겨져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제안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경험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다루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을 “논쟁을 끝내는 최종 증거”가 아니라, 서로의 억압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열린 논의의 출발점으로 다시 위치시킬 때, 정체성 정치는 본래의 힘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전망이 보일 것이다.

참고문헌

Collins, Patricia Hill. Black Feminist Thought: Knowledge, Consciousness, and the Politics of Empowerment. 2nd ed. New York: Routledge, 2000. Davis, Lennard J. The End of Normal: Identity in a Biocultural Era. 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13. Dotson, Kristie. “Conceptualizing Epistemic Oppression.” Social Epistemology28, no. 2 (2014): 115–38. Kruks, Sonia. Retrieving Experience: Subjectivity and Recognition in Feminist Politics.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2001. Porter, Christa J. “Rearticulating Black Womanhood: Reconceptualizing Black Women’s Identity Development in College.” PhD diss., Michigan State University, 2013. Scott, Joan W. “The Evidence of Experience.” Critical Inquiry17, no. 4 (1991): 773–97.

  1. 예를 들어, 미국 대선 이후 “identity politics”를 둘러싼 정치 칼럼에서는, 민주당이 소수자 집단의 정체성만 강조하다가 “보통 사람들”을 잃었다는 식의 비판이 자주 등장한다. 한국에서도 “정체성 정치가 공동체를 분열시킨다”는 논조의 칼럼들이 등장하며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고는 한다. 

  2. 여기서 “살아온 경험”이라고 할 때, 단지 느낌이나 감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서 반복적으로 겪게 되는 사건들, 그 사건들을 해석하는 방식, 그 과정에서 형성된 자기 이해를 모두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3. “누가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의 문제를 함께 묻는다는 점에서, 정체성 정치는 항상 인식론과 정치이론을 동시에 건드리는 논쟁을 낳는다. 

  4. “입장 인식론”(standpoint epistemology)은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서 바라본 관점이 인식론적 특권을 가진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입장의 위험은, “누가 어떤 정체성을 가졌는가”가 곧 “누가 말할 자격이 있는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 정체성 경계 안팎에서 배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5. “본질주의”(essentialism)는 어떤 범주(예: 여성, 흑인)에 속하는 모든 개인이 공유하는 고정된 본질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입장의 문제는, 그 범주 내의 다양성과 차이를 지우고, 범주를 역사적·문화적 맥락과 무관한 자연적 사실처럼 취급한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6. “입장 인식론”에 대한 설명은 각주 7 참조. 

  7. 장애를 사회적·정치적 문제로 재해석하는 논의로는, Lennard J. Davis, The End of Normal(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13) 등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장애 경험이 개인의 결함이 아닌, 특정한 신체를 중심으로 설계된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을 강조한다. 

  8. “인식론적 억압”(epistemic oppression)은 특정 집단이 지식 생산과 소통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거나, 그들의 증언이 체계적으로 불신당하는 현상을 가리킨다(Dotson,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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