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본) 과제-09 기말과제 013-05 김무성

제목: 분배 정의의 새로운 원칙, 충분성주의

서론

분배 정의에 관한 정치철학적 논의는 오랜 기간 ‘불평등의 심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해소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현대 사회에서 흔히 관찰되는 억만장자와 빈민 사이의 엄청난 격차는 직관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상태로 느껴지며, 이는 격차를 완화하기 위한 재분배 정책에 대한 도덕적 근거로 작용한다. 이론적으로는 존 롤즈나 로널드 드워킨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평등주의가 정의로운 사회를 단순한 결과의 평등이 아닌, 불평등이 허용되는 조건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방식으로 규정하며 결과적으로 현대 사회의 심각한 경제적 격차를 문제 삼아 왔다. 이러한 논리는 현대 복지 국가와 재분배 정책을 옹호하는 가장 강력한 철학적 근가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평등주의는 최근 여러 차원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 먼저 신자유주의 진영의 이념적 비판은 주로 자유주의적 평등주의가 정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하며, 분배의 결과를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교정하려 한다는 점을 문제 삼는다. 보다 본질적인 비판은 이념적 차원과 무관하게 인간의 심리와 사회적 수용성의 맥락에서 제기된다. 자유주의적 평등주의는 표면적으로 ‘부당한 격차’를 해소하려고 하지만, 그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실제로는 타인과의 ‘비교’를 전면화시킨다. 이는 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을 사람들이 끊임없이 타인의 몫과 성취에 곁눈질 하는 비교의 과정으로 변질시켜 개인을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삶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또한 성취의 기반을 이루는 재능, 노력, 운과 같은 요소의 도덕적 임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논리는 필연적으로 성취에 대한 사람들의 직관과 충돌을 일으켜 재분배 정책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을 오히려 저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난맥상 속에서 우리는 분배 정의의 도덕적 근거가 무엇인지, 또 분배 정의는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 정의의 새로운 원칙을 모색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해리 프랭크퍼트(Harry Frankfurt)가 제시한 ‘충분성주의’(Sufficientarianism)가 새로운 분배 정의 원칙의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다. 충분성주의는 정의의 궁극적인 목표를 사회 구성원 사이의 격차 해소가 아닌, 모든 구성원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충분성’(Threshold)을 확보하는 것으로 설정한다. 이때 충분성이란 단순히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생존이나 빈곤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프랭크퍼트가 제안하는 충분성은 한 개인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그가 누리는 삶의 수준이 제3자가 봤을 때도 ‘그 정도면 만족할 만하다’라고 동의할 수 있으며, 개인이 정치적·사회적 시민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물론 프랭크퍼트의 논의 역시 한계가 있다. 그가 주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평등주의는 결과의 기계적 평등을 주장하는 단순한 형태의 평등주의였다. 절차적 공정성과 운의 보정을 정교하게 이론화해 강조하는 롤즈나 드워킨과 같은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자들은 프랭크퍼트의 공격에서 다소 비켜가 있다. 이에 본고는 다른 학자들의 논변을 차용해 프랭크퍼트 이론의 한계를 보완함으로써, 충분성주의가 자유주의적 평등주의를 대체하는 분배 정의의 대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본고는 다음과 같은 논증 전략을 사용한다. 우선 조셉 라즈(Joseph Raz)의 ‘비-비교적(non-comparative) 권리’ 개념을 도입해 분배 정의의 도덕적 근거를 재정의한다. 권리와 의무의 근거를 타인과의 관계가 아닌 개인의 속성 자체에서 찾아 평등주의가 봉착하는 ‘비교에 따른 자기 소외’ 딜레마를 해소할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이어서 로저 크리스프(Roger Crisp)의 ‘베벌리 힐즈 논증’과 라즈의 ‘수확 체감의 원리’를 통해 분배 정의가 도덕적 당위성을 가질 수 있는 한계를 설정한다. 충분성 도달 이후의 격차에 관한 문제를 분배 정의의 영역에서 분리해, 충분성주의가 갖는 충분성 도달 이후에 대한 무관심의 난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과도한 개입을 우려하는 신자유주의적 비판과 사회적 수용성의 문제까지 포괄적으로 해소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논증 전략에 기반한 본론의 서술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라즈의 권리 이론을 바탕으로 분배 정의의 도덕적 기반이 왜 평등(비교)이 아닌 충분성(절대적 결핍 해소)에 있어야 하는지 분석한다. 이어서 권리의 비-비교적 성격으로부터 분배 정의가 정당화될 수 있는 한계를 설정한다. 이때 충분성 도달 이후의 격차에 개입해야 할 의무가 분배 정의에 있다는 예상 반론을 다루고, 도구적 요구와 정의의 본질은 서로 무관하다는 재반박을 제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롤즈와 드워킨의 주장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적 평등주의가 앞서 정의한 분배 정의의 요건에 부합하지 않음을 보이고, 그 대안으로서 충분성주의가 분배 정의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원칙임을 강조하며 논의를 마무리할 것이다.

본론

분배 정의의 도덕적 근거

분배 정의의 도덕적 근거는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개별 주체가 지닌 존엄성, 필요, 취약성과 같은 내재적 속성 그 자체에서 도출되어야 한다. 라즈의 권리 분류가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한다. 라즈에 따르면, 권리와 의무의 본질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비교적’(comparative)인 것이 아니라 개별 주체의 속성에서 독립적으로 도출되는 ‘비-비교적’(non-comparative)인 것이다. 정치적 슬로건으로 흔히 사용되는 “모든 인간은 동등한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명제를 분석해보자. 이 문장의 참뜻은 타인과 똑같이 대우하라는 산술적 지침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존중받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Being human is in itself sufficient ground for respect)”는 것이다. 여기에서 ‘동등한’(equal)이라는 수식어를 제거하더라도 문장이 갖는 도덕적 구속력은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Raz 1986, pp. 228-229) 즉, 평등은 권리의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여진 수사에 불과할 뿐, 권리의 내용을 구성하는 독립적 가치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비-비교적 접근은 인간 존엄성이 갖는 절대적 지위와도 잘 부합한다. 프랭크퍼트가 평등보다 ‘존중’이 더 근본적인 도덕적 가치임을 역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인의 존엄성은 타인과의 비교와 무관하게 성립한다. 어떤 사람이 도덕적으로 고려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가 다른 사람보다 ‘덜’ 가져서가 아니라 그가 존엄한 인간으로서 결핍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프랭크퍼트 2019) 그러나 분배 정의를 비교적 권리와 의무의 틀에서 규정하면, 존엄의 판단 기준은 ‘어떤 상태가 인간으로서 용납 가능한가’라는 절대적 질문에서 ‘타인과 비교해 어떤 위치에 있는가’라는 상대적 질문으로 환원되고 만다. 이는 치명적인 도덕적 오류로 이어진다. 정의를 비교의 문제로 환원하면, 존엄은 침해받을 수 없는 절대적인 권리의 기준이 아니라, 사회적 서열과 상대적 평가에 따라 작동하는 상대적인 지위로 전락한다. 즉 나의 존엄이 보호받아야 할지 여부가 타인의 목과 상태, 선택에 의해 조건지워지는 것이다.

비교적 권리와 비-비교적 권리를 다음과 같은 의료 배분의 딜레마 상황에 대입해보자.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 A와 비교적 건강한 환자 B가 입원한 병원을 가정한다. 병원에는 한 명의 환자에게만 투여할 수 있는 양의 진통제가 준비되어 있고, 의사는 이를 누구에게 투여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환자 A에게 진통제를 투여해야 할 도덕적 당위성은 어디서 발생하는가? 비교적 정의관을 따르면, 이는 환자 A가 옆 침대에 있는 건강한 환자 B보다 행복의 수준이 더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도덕적 직관과 어긋난다. B가 존재하지 않거나 B 역시 A와 동일한 고통을 겪고 있어 불평등이 전혀 없는 상황일지라도, A에게 진통제를 투여해야 할 도덕적 의무는 여전히 성립한다. 이 의무의 근거는 A와 B 사이의 상대적 격차가 아닌 A가 겪는 극심한 고통이라는 비-비교적이고 절대적인 상태에 있다. 이러한 의료 배분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정의의 원칙은 타인과 무관하게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배 정의는 ‘누가 누구보다 얼마나 더 가졌는가’의 비교를 멈추고, ‘각자가 인간으로서 충분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라는 본질적 문제로 돌아와야 한다.

분배 정의 개입의 한계

분배 정의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개별 주체의 비-비교적 존엄과 필요에 기초할 때, 정의의 요구는 무한히 확장될 수 없다. 분배 정의의 구속력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충분성(Threshold)에 도달할 때까지만 유효하다. 앞서 논의한 ‘존중’의 개념을 다시 살펴보자. 어떤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가 가진 몫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 어떤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필요한 조건이 충족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필요가 충족되어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존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했다면,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정의의 문제가 아니다. 프랭크퍼트가 지적했듯이 자신의 삶에 합리적으로 만족하는 사람에게 사회적 자원을 더 투입해야 할 도덕적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배 정의의 한계 설정은 행복이나 복지와 같은 가치가 갖는 속성인 ‘포화성’(satiability)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라즈는 이를 ‘수확 체감의 원리’로 설명한다. 행복은 쾌락의 기계적 총합이 아니라 질적 상태이므로, 이미 충분히 행복한 사람에게 쾌락을 유발하는 자원을 더 준다고 해서 그의 삶이 유의미하게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을 주는 행위는 생존과 존엄을 지키는 행위로 도덕적 가치가 높지만, 이미 배가 부른 사람에게 빵을 더 주는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현저히 떨어진다. (Raz 1986, pp.242-243) 즉, 충분성이 충족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결핍은 고통과 존엄의 훼손을 의미하므로 정의가 개입해야 할 ‘도덕적 긴급성’(moral urgency)이 있지만, 충분성 위에서의 격차에 분배 정의가 개입할 근거는 없다.

크리스프의 ‘베벌리 힐스 논증’은 분배 정의의 도덕적 의무는 유한하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베벌리 힐스에 거주하는 10명의 초부자(Super-rich)와 10,000명의 일반 부자(Rich) 사이에 최고급 와인을 분배해야 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분배 정의에 한계선이 없다면, 우리는 두 집단 중 상대적으로 ‘덜 부유한’ 10,000명에게 와인을 먼저 나누어줘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현실적으로 지지받기 어려울 것이다. 두 집단 모두 이미 절대적인 충분성 위에 위치해 있으며, 그들 사이의 격차는 어떠한 객관적인 고통이나 존엄의 훼손도 유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연민’이나 ‘정의’의 언어는 힘을 잃는다. 그들 사이의 분배 문제는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선호 충족의 문제일 뿐이다. (Crisp 2003, pp.755-762)

결국 올바른 분배 정의는 유한한 속성을 가지며, 정의의 이름으로 개입할 수 있는 한계선을 그어야 한다. 분배 정의는 임계점 도달 이후의 분배에 개입할 의무가 없다. 절대적 충분성이라는 임계점에 도달한 이후 정의의 의무는 종결되며, 분배 정의는 그 이후의 격차에 대해 ‘도덕적 무관심’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반론: 협동의 공정성과 무관심 명제의 오류

그러나 분배 정의가 임계점 도달 이후에 무관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분배의 대상이 되는 재화는 사회적 협동의 산물이라는 점을 간과했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즉, ‘포화성’과 ‘수확 체감’이라는 원칙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개인이 생존하거나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자원에 한정될 뿐이다. 사회적 협동을 통해 산출된 ‘잉여 생산물’을 분배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특정한 공정성의 원칙이 요구된다. 롤스와 유사한 입장을 가진 폴라 카살(Paula Casal)이 지적한 바와 같이, 만약 ‘무관심 논변’을 수용한다면 모든 구성원이 빈곤선을 넘은 풍요로운 사회에서 발생한 막대한 추가 이익을 독재자 한 명이 독식하든, 혹은 소수의 재벌이 독점하든, 정의의 관점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Casal 2007, pp.297-300) 카살은 특히 ‘부자와 초부자의 와인 분배 문제에 신경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만약 이러한 논리를 수용한다면 모든 사람이 빈곤선을 넘은 사회에서 ‘진보적 조세’를 정당화할 근거가 사라진다. 만약 모든 아이들이 학교에 다녀 교육의 충분성이 달성된다면, 부유한 부모를 둔 아이가 더 많은 기회를 독점해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이 훼손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Casal 2007, p.311)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분배 정의의 역할을 협소하게 축소하는 것은 정의의 역할과 기능을 단지 고통의 제거라는 소극적 차원에서만 이해한 것으로, 분배 정의는 절대적 결핍의 해소뿐만 아니라 사회적 협동의 공정한 대가 산정과 민주적 평등 유지를 위해서라도 임계점 이상의 격차에 개입할 의무를 가져야 한다.

재반론: 도구적 요구와 정의의 본질

그러나 위와 같은 반론은 정의와 ‘바람직함’을 혼동한 주장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오류가 있다. 첫째, 롤스나 카살이 제기하는 ‘잉여 산출물의 공정한 분배’라는 요구는 엄밀히 따지면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선호의 영역이거나, 혹은 세련된 형태로 위장된 시기심(Envy)일 가능성이 높다. 프랭크퍼트의 논리대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합리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충분한 몫을 확보했다면, 그 위에서 발생하는 잉여를 누가 더 가져가는가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질이 훼손되어서가 아니라 단지 남이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을 배 아파하는 심리적 기제에 불과하다. 정의는 고통을 제거하고 권리를 보장해야 하지만, 시기심을 충족시켜 줄 의무는 없다. 만약 독재자의 독식이 문제라면, 그것은 그가 타인의 몫을 침해했거나(권리 침해), 정치적 자유를 억압했기(자유 침해) 때문이지, 단순히 부의 격차가 커서가 아니다. (프랭크퍼트 2019)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억만장자의 추가적인 부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다. 만약 이를 진보적 조세나 기회 균등 원칙에 따라 제한한다면 그것은 사회적 효용이나 안정성을 위한 도구적 측면에서 제한되는 것이지, 정의의 필수 원칙에 따라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무관심 명제에 대한 비판은 정의의 도덕성의 초점을 흐리는 결과를 불러온다. 라즈가 지적했듯이 가치는 포화성을 지니기 때문에 절대적 수준 위에서의 분배 갈등은 빈곤선 아래의 고통에 비해 도덕적 긴급성 내지는 도덕적 우선순위가 현저히 떨어진다. 카살은 충분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공정성)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자원을 투입하자고 주장하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어야 할 주의와 자원을 분산시키게 된다. 분배 정의는 ‘결핍의 제거’라는 가장 본질적이고 비-비교적인 과제에 집중되어야 한다. 예컨대 카살이 예시로 든 부유층 자녀의 사례에서 진정한 문제는 부유층 자녀가 더 많은 기회를 갖는 것이 아니라, 빈곤층 자녀가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에 충분히 좋은 교육과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지점에 있다. 만약 모든 아이가 재능을 실현하기에 충분한 교육을 받는다면(절대적 충분성 달성), 그 위에서 일어나는 부모의 추가적 지원의 차이는 정의가 개입해야 할 영역이 아닌 가족의 자율적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카설의 비판은 정의 영역에서의 도덕적 요구와, 사회문제의 도구적 해결을 혼동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의 한계와 대안으로서의 충분성주의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자유주의적 평등주의는 ‘분배 정의의 도덕적 근거 설정’과 ‘분배 정의 개입의 한계점 설정’이라는 두 차원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반면 충분성주의는 이 오류들을 해소하고 왜곡된 분배 정의의 원칙을 바로잡을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이다. 먼저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롤스의 입장을 살펴보자. 그의 ‘차등의 원칙’은 최소수혜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는 점에서 직관적인 설득력을 갖지만, 도덕적 긴급성이 사라진 이후에도 분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분배 정의 개입의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 오류를 범한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이미 시민으로서 존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충분한 수준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격차를 줄이기 위해 사회적 자원을 끊임없이 최소수혜자에게 투입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자원 배분의 합리성에 배치된다. 반면 충분성주의는 충분한 수준, 즉 충분성이라는 목표를 제시해 제시해, 정의가 개입해야 할 시점과 멈춰야 할 시점을 분명히 하고 자원 배분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한다.

한편 드워킨은 분배 정의에서 발생하는 권리와 의무를 철저히 비교적인 것으로 규정해 더 근본적인 오류를 초래했다. 드워킨에게 정의란 “내가 남의 자원 꾸러미를 부러워하지 않는 상태”(envy-free)로 정의되는데, 이는 개인의 권리와 사회적 의무가 특정인의 내재적 가치, 존엄성, 또는 필요가 아닌 타인의 소유물과의 상대적 관계에 의해 결정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비교적 권리 개념은 시민들로 하여금 “남이 무엇을 가졌는가?”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비교할 의무를 부과한다. 이는 프랭크퍼트의 지적처럼 ‘시기심’이라는 병리적 감정을 정의의 영역으로 잘못 끌어올리는 것과 다름 없으며,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삶의 목표와 필요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드는 ‘자기 소외’를 유발한다. 분배 정의의 근거인 진정한 존중은 타인과의 비교 우위를 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실질적 역량을 갖췄는가에 주목하는 것이다.

따라서 충분성주의는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에 의해 왜곡된 분배 정의의 본질을 두 차원에서 복원한다. 첫째, 충분성주의는 정의의 ‘비-비교적 본질’을 회복한다. 평등주의는 정의를 ‘남보다 적게 갖지 않을 권리’로 곡해해 정의를 상대적 관계의 문제로 격하시켰다. 반면 충분성주의는 타인의 소유와 무관하게 오직 인간으로서의 필요와 존엄이 충족되었는가를 질문하며 정의의 독립성을 지켜낸다. 둘째, 충분성주의는 정의의 ‘범위’를 명확히 설정한다. 롤스식의 최대화 전략은 정의의 요구를 무한대로 확장시켜 도덕적 의무를 비현실적인 과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충분성주의가 제시하는 ‘충분성’이라는 임계점은 정의가 필수적으로 개입해야 할 영역(생존, 존엄)과 개인의 자율에 맡겨야 할 영역(취향, 사치)을 엄격히 구분해, 분배 정의의 도덕적 당위성과 현실적 수용성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결론

본고는 분배 정의가 준수해야 할 두 가지 전제를 논증하였다. 우선 분배 정의의 도덕적 근거를 타인과의 관계적 비교가 아닌, 개별 주체의 비-비교적인 내재적 속성에서 도출해야 한다는 점을 논증하였다. 조셉 라즈의 비-비교적 권리 이론에 따르면 정의의 본질은 상대적 격차 해소가 아니라 인간 존엄을 위협하는 절대적 결핍의 해소에 있다. 나아가 행복과 필요가 지닌 포화성과 수확 체감의 원리는 정의의 개입이 무한히 확장될 수 없음을 시사하며, 이에 따라 분배 정의의 의무는 모든 구성원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충분성’의 임계점에 소멸한다는 점을 밝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유주의적 평등주의는 ‘시기심의 제도화’와 ‘자기 소외’라는 딜레마를 초래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의의 목표를 ‘충분성의 확보’에 두는 충분성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논증을 마쳤다.

이러한 충분성주의로의 전환은 분배 정의의 원칙을 정립하고, 자유주의적 평등주의가 직면한 비판을 해소할 방법을 밝혔다는 점에서 학문적 의의가 있다. 본 논의는 도덕적 긴급성이 요청되는 필수적 영역과 개인의 자율이 존중되어야 할 영역을 엄격히 구분해, 정의의 도덕적 당위성을 회복하고 현실적 수용성을 제고했다. 다만, 본 연구는 구체적인 충분성의 기준을 제시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는다. ‘충분성’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프랭크퍼트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의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 충분성을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작업은 후속 연구를 통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각자가 고유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충분한 토대를 공유하는 사회여야 한다는 본 연구의 제언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참고문헌

프랭크퍼트, 해리. (2019). 평등은 없다 (안규남 역). 아날로그. (e-Book)

Crisp, Roger. (2003). “Equality, Priority, and Compassion.” Ethics, 113(4), 745-763.

Raz, Joseph. (1986). The Morality of Freedom. Oxford University Press.

Casal, Paula. (2007). “Why Sufficiency Is Not Enough.” Ethics, 117(2), 296-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