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 과제-08 기말과제 초고 작성하기 013-06 김기연

제목: 능력주의의 부정의: 공로 기준의 자기부정을 중심으로

서론

오늘날 한국에서 능력주의는 입시, 채용, 승진 등 거의 모든 공적 절차에서 공정성을 보증하는 언어로 사용된다. ‘능력대로 뽑는 것이 곧 공정하다’는 말은 제도적 판단을 정당화하는 가장 즉각적인 표현이 되었고, 불투명한 특혜나 혈연·지연을 비판할 때조차 “능력주의가 무너졌다”는 말이 쉽게 동원된다. 이런 점에서 능력주의는 단순한 분배 방식이 아니라, 무엇이 정당한 대우인지 판단하는 일상적인 직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간 이론적 논의에서는 이러한 능력주의를 둘러싸고 상반된 평가가 제기되어 왔다. 한편에서는 능력주의가 신분과 연줄 대신 개인의 성취를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적어도 형식적 차원에서는 평등한 기회를 확장했다고 본다(Loury 1981, pp. 854–855). 다른 한편에서는 능력주의가 표면적으로는 자격에만 주목해 모두를 ‘동등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주어진 재능과 자원의 차이를 은폐한 채 기존의 불평등 구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Sachs‑Cobbe 2023, p.182). 이처럼 능력주의는 공정성을 보장하는 기제로 이해되기도 하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반된 평가와 별개로, “능력에 따라 보상하는 것 자체가 정의로운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열려 있다.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입장과 비판하는 입장 모두, 암묵적으로 능력과 공로, 책임의 관계에 대한 어떤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가 단지 현실에서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만 비판될 수 있는지, 아니면 그 정의 개념 자체가 내적으로 모순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때 핵심 쟁점은 능력주의가 공로를 인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기준이 정의의 더 일반적인 원칙들과 양립 가능한지 여부다. 그러므로 능력에 따라 차등 배분하는 것이 정말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능력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며, 어떤 기준 아래에서만 분배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이 글에서는 세 단계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첫째, 능력주의가 어떤 조건에서만 공로를 정당하게 인정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어떤 능력과 노력이 ‘정당한 보상 자격’을 형성한다고 가정하는지를 분석한다. 둘째, 현실에서 우리가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선천적 재능과 출생 환경 같은 우연적 요소에 깊이 의존한다는 점을 보여 줌으로써, 능력주의가 요구하는 공로의 조건이 실제 사회에서 충족되기 어렵다는 점을 드러낸다. 셋째, 정의로운 분배가 따라야 할 원칙을 선택과 운의 구분이라는 관점에서 정식화하고, 그 원칙에 비추어 능력주의가 스스로 세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구조적 모순에 빠진다는 점을 논증한다. 이를 통해 능력주의가 공정성을 말하는 유력한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운 분배 원리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결론을 제시할 것이다. 한편 본 논증에 대한 예상반론으로 선택–운 구분은 능력주의 내부 규범이 아닌 외부 이론의 강제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능력주의가 최초 제시될때부터 공로를 ‘선택과 책임’으로 정의해 선택–운 구분을 스스로 내포하였음을 보임으로써 반론은 해소된다. 위와 같은 전개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 분배원리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그 함의를 살펴본다.

본론

­­능력주의의 규범적 전제: 선택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기회와 보상을 분배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규범적 직관은 능력이 교육적·사회경제적 성과의 주된 결정 요인이라는 이른바 meritocracy thesis에 의존하며(Marks 2010, pp. 1–3), 공부에 들인 시간, 직무에서 기울인 추가적 노동 등과 같이 개인이 통제 가능한 선택적 행위가 곧 공로에 대한 도덕적 자격을 구성한다는 암묵적 가정 위에서 작동한다. 따라서 능력주의는 “능력은 주로 개인의 선택적 노력에서 기원하며, 그러한 능력 격차는 도덕적으로 정당한 보상의 근거가 된다”는 두 가지 전제를 동시에 요구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능력주의의 논리적 취약성이 발생한다. 실제 사회에서 ‘능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사실적 조건이 이러한 규범적 전제를 뒷받침하는지 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능력 형성에 개입하는 비선택적 요인들

능력주의가 주장하는 바와 달리, 능력 형성은 개인의 선택적 노력이 아니라 선천적·환경적 요인을 포함한 운(luck)의 구조적 개입을 통해 상당 부분 결정된다. 선천적 인지능력, 신체적 조건, 부모의 소득·학력, 가정의 문화 자본, 영유아기 교육 자원 등은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 있으며, 이러한 요인들이 누적적으로 작동해 학업 성취와 노동시장 성과를 예측한다는 점은 경제학·발달심리학 연구에서 일관되게 확인된다(Heckman 2006, p. 1–4). 롤즈는 자연적 재능과 사회적 배경의 분포가 임의적임을 지적하며, 제도는 이러한 임의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통해 정의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Rawls 1999, pp. 54–63). 이 사실적 조건을 인정하면, 능력주의가 전제로 삼는 “능력은 개인의 선택의 결과”라는 가정은 경험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정의의 기준: 선택에는 민감하고 운에는 둔감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능력 형성이 선택적 요인과 비선택적 요인의 결합이라는 사실은 분배의 정당성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라는 규범적 질문을 다시 제기한다. 일반적으로 정당한 분배는 개인의 선택에서 비롯된 차이에 대해서는 민감해야 하지만,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운에서 기원한 차이를 보상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따른다. 이는 사회적·자연적 ‘추첨’(social lottery)이 만들어낸 불평등을 도덕적 자격으로 승인해서는 안 된다는 정의론적 전통과도 맞닿는다(Rawls 1999, pp. 72–75; Sachs-Cobbe 2023, pp. 5–7). 만약 이 원칙을 수용한다면, 정당한 보상은 오직 선택적 행위에서 기원한 차이에 기반해야 하며, 선택 불가능한 운에서 비롯된 격차는 분배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이 규범적 기준은 곧 능력주의가 스스로 제시한 정당화 구조가 유지되기 위해 충족해야 할 핵심 조건을 형성한다.

능력주의의 자기모순: 선택과 운의 혼재

앞선 논점을 결합하면 능력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드러난다. 능력주의는 선택된 공로를 보상의 기준으로 삼겠다고 선언하면서도, 실제 사회에서 평가되는 능력은 선천적 재능과 가정환경 등 비선택적 요인의 영향 아래 형성된다. 다시 말해,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선택’의 결과만 보상한다는 규범적 약속을 표방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선택 불가능한 운의 결과를 보상의 근거로 승인하는 체계를 운영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능력주의가 불완전하다는 지적이 아니라, 그 정당화 논리가 자기 자신이 제시한 규범적 전제와 충돌해 붕괴한다는 점에서 원리 정립 차원의 심각한 문제이다. 능력주의는 선택의 자격을 보상하겠다는 명분 아래, 실제로는 운의 분포를 도덕적 자격으로 변환하는 제도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조망할 만하다.

외부 정의관 반입 관련 예상반론과 재반박

그러나 능력주의 옹호자들은 이러한 비판이 능력주의 내부의 규범적 구조를 분석한 것이 아니라, 롤즈적 정의관을 외부에서 들여와 능력주의에 부당하게 적용한 결과라고 지적할 수 있다. 즉, ‘선택 가능한 요소만을 도덕적 자격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선택–운 구분은 능력주의 자체의 규범적 전제가 아니라, 특정 정의 이론이 설정한 별도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능력주의는 공로를 평가할 때 선천적 재능이나 사회적 배경이 도덕적으로 ‘임의적’인지 여부를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능력주의는 능력, 즉 선천적 재능을 포함한 생산성 관련 요인들 자체가 분배에서 정당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가정하므로, 선택–운 구분을 적용해 능력주의가 자기모순에 빠진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질문’을 던지는 셈이라는 비판이다. 요컨대, 능력주의 비판이 성립하려면 먼저 능력주의가 선택–운 구분을 규범적 원리로 수용해야 하는 이유를 독립적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보상은 개인의 공로와 책임에 따라야 한다’는 능력주의가 원리 정립을 위해 스스로 내건 조건을 간과한다. 능력주의가 공로를 분배 기준으로 삼는 이유는, 그 공로가 개인의 선택과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능력주의 개념이 최초로 정식화된 순간부터 분명히 드러난다. 능력주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Young(1958)은 능력(merit)을 “intelligence plus effort”의 결합으로 정의했으며, 전자는 타고난 능력(inborn endowment), 후자는 행위자의 통제 가능한 선택(controllable effort)이라는 구분을 전제로 삼는다(Young 1958, pp. 18–20). 즉 능력주의의 개념적 구조는 처음부터 선택 가능한 요소와 선택 불가능한 요소를 분리하는 규범적 틀 위에서 성립해 왔다. 다시 말해, 능력주의는 이미 책임 귀속(responsibility attribution)을 핵심 요소로 전제하고 있으며, 이는 곧 선택–운 구분의 최소 형태를 내포한다. 능력주의가 ‘선택된 노력’을 공로로 인정하며 시험 준비·업무 성실성처럼 행위자의 통제 하에 있는 요소를 도덕적 자격의 근거로 삼는 순간, 능력주의는 자연적·사회적 운을 공로의 정당화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동일한 원칙을 받아들인 셈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운 구분은 외부 이론이 강제한 척도가 아니라, 능력주의가 공로 개념을 통해 스스로 채택한 규범적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이 점에서 선택–운 구분을 배제하려는 시도는 능력주의가 왜 공로를 도덕적 기준으로 삼는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설명을 흔들게 되며, 결과적으로 능력주의 내부에서 스스로 세운 책임의 원리를 파기하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유효한 반박이 될 수 없다.

결론

이 글의 논증은 세 단계의 구조를 따라 전개되었다. 먼저 능력주의가 공로를 정당한 분배 기준으로 삼기 위해 어떤 규범적 조건을 필요로 하는지 분석함으로써, 능력주의가 본질적으로 행위자의 선택과 책임을 중시하는 원리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어서 현실에서 능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검토한 결과, 능력이라 불리는 특성의 상당 부분이 선천적 재능과 사회경제적 배경 같은 선택 불가능한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실을 선택–운 구분이라는 정의의 일반 원칙에 비추어 평가함으로써, 능력주의가 스스로 내건 책임의 원리를 충족하지 못해 구조적 모순을 피할 수 없음을 논증했다. 또한 능력주의 비판이 롤즈적 정의관의 외부 강제가 아니라, 능력주의 개념 자체가 선택–운 구분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Young(1958)의 규범적 정의를 통해 확인하며 예상반론을 해소하였다. 능력주의는 오늘날 공정성을 판단하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언어로 작동하지만, 그 규범적 구조와 경험적 조건을 면밀히 검토하면 정의로운 분배 원리로 기능하기 어렵다는 점이 드러난다. 능력주의는 스스로 공로와 책임을 분배의 정당화 기초로 삼는다고 선언하지만, 현실에서 능력이라고 불리는 특성은 선천적 재능과 사회적 배경 같은 선택 불가능한 요인에 깊이 의존한다. 이로써 능력주의는 선택된 노력만을 보상하겠다는 자신의 규범적 약속을 온전히 이행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선택–운 구분을 핵심으로 하는 정의의 더 일반적인 원칙과 충돌하게 된다. 특히 Young(1958)이 능력주의를 ‘지능과 노력’의 결합으로 개념화하며 선택 가능한 요인을 공로의 핵심으로 설정한 사실은, 능력주의가 출발점부터 책임 귀속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조적 전제가 존재하는 이상, 능력주의는 외부 정의 이론의 강제에 의해 비판받는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 자체가 세운 규범적 조건에 의해 스스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체계이다. 이 글은 능력주의가 요구하는 공로의 조건, 능력 형성의 실제 메커니즘, 그리고 정의 원리가 따라야 할 규범적 기준을 단계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능력주의가 스스로 제시한 원칙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구조적 모순을 드러냈다. 이는 능력주의가 사회적 효율성이나 경쟁 질서의 운영 방식으로는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정의로운 분배의 원리로는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함의를 갖는다. 결국 능력에 따른 보상이 정의롭다는 통념은 그 자체로 재검토되어야 하며, 우리가 어떤 기준을 분배의 정당한 근거로 삼을 수 있는지에 대한 더 근본적인 논의가 요구된다.

참고문헌

Heckman, J. J. (2006). Skill formation and the economics of investing in disadvantaged children. Science, 312(5782), 1900–1902.​ Loury, G. C. (1981). Intergenerational transfers and the distribution of earnings. Econometrica, 49(4), 843–867.​ Marks, G. N. (2010). Meritocracy, modernization and students’ occupational expectations. Research in Social Stratification and Mobility, 28(4), 431–443.​ Rawls, J. (1999). A theory of justice (Rev. ed.). Harvard University Press.​ Sacerdote, B. (2011). How does parental wealth affect children’s outcomes? Journal of Economic Perspectives, 25(1), 171–192.​ Sachs-Cobbe, A. (2023). Meritocracy in the political and economic spheres. Philosophy Compass, 18(10), e12947.​ Young, M. (1958). The rise of the meritocracy. Thames & Hud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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