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 과제-08 기말과제 초고 작성하기 013-05 김무성
제목: 분배 정의의 새로운 원칙, 평등주의의 대안으로서의 충분성주의
서론
분배 정의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오랜 기간 ‘불평등의 심화’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부유한 사람과 빈곤한 사람 사이의 벌어지는 격차는 직관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상태로 인식된다. 이에 따라 많은 평등주의자들은 격차 자체를 줄이는 것을 분배 정의의 핵심적 과제로 다루고 있다. 예컨대 래리 템킨(Larry Temkin)은 불평등이 그 자체로 악(bad)이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는 것은 그 결과와 관계없이 도덕적 개선의 일면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비슷한 입장에서 G.A. 코헨(G.A. Cohen)은 평등주의의 진정한 목적이 ‘비자발적 불이익’(involuntary disadvantage)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정의가 본질적으로 타인과의 비교에 의존하는 ‘관계적(relational)’ 개념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정의의 본질적인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만약 격차를 줄이는 것이 그 자체로 선(good)이라면, 부유한 사람의 부를 빼앗아 사회의 전반적인 경제적 수준이 하향 평준화되는 상황조차도 도덕적 개선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논리적 모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문제 인식을 갖는 지점이 ‘타인보다 적게 가진 것’(상대적 격차)에 있는지, 아니면 ‘인간다운 삶을 살기에 부족한 상태’(절대적 결핍)에 있는지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고는 분배 정의의 도덕적 당위성이 부의 격차를 줄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절대적 수준(Threshold)의 충분성(Sufficiency)을 확보하는 데 있다는 점을 보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고는 평등이 ‘본래적 가치’(intrinsic value)가 아니며, 분배 정의의 도덕적 기준은 평등이 아닌 충분성임을 논증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해리 프랭크퍼트의 충분주의를 골자로 하되, 데릭 파피트, 조셉 라즈, 로저 크리스프의 논의를 통해 평등주의의 논리적 허점을 보이고 도덕 원리로서 충분성의 타당성을 확립할 것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한 본론의 서술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데릭 파피트의 ‘하향 평준화 반론’을 통해 평등을 본래적 가치로 받아들일 경우 혜택 없는 평등조차 옹호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격차 해소 자체는 도덕적 목표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파생적 가치를 지닐 뿐이라는 점을 밝힐 것이다. 다음으로, 조셉 라즈의 ‘수사학적 평등’ 개념과 프랭크퍼트의 논의를 결합하여, 분배 정의에서 도덕적 청구권의 본질은 타인과의 비교(상대적 권리)가 아니라 개인의 필요 충족(절대적 권리)에 있음을 드러낼 것이다. 이어서 로저 크리스프의 ‘연민의 임계점’ 이론과 라즈의 ‘포화성’(Satiability) 개념을 도입하여, 분배 정의가 개입해야 하는 도덕적 근거는 공정성이 아닌 고통에 대한 연민이며, 그러므로 절대적 충분선을 넘어선 이후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은 분배 정의 혹은 도덕적 과제와 무관함을 보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절대적 수준이 충족되더라도 상대적 박탈감이 여전히 고통을 유발한다는 ‘지위재’ 개념 기반의 반론에 대하여, 이는 사회적 존중의 문제를 물질적 격차의 문제로 오인한 것임을 지적하며 논의를 종결할 것이다.
본론
‘격차’의 도덕적 무의미성과 평등주의의 한계
‘격차 해소’를 분배 정의의 도덕적 목표로 두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평등 그 자체에는 본래적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분배 정의의 목표를 격차 해소에 두는 평등주의는 직관적으로 정의로워 보이지만, 논리적으로 검토하면 개인의 실존과 도덕적 직관을 모두 배반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프랭크퍼트가 지적한 것처럼, 평등을 본래적 가치로 추구하는 태도는 인간 소외를 유발한다. 평등주의적인 관점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만족을 타인이라는 외부 변수에 종속시킨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삶의 조건과 필요에 집중하게 하는 대신, 타인의 삶과 자신을 비교하는 데 정신적 자원을 소모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개인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주체적이고 내적인 질문 대신 “남이 무엇을 가졌는가?”라는 외적인 비교에 집착하게 만들어, 개인을 자신의 고유한 삶의 목표와 필요로부터 유리시킨다. (Frankfurt 2019)
프랭크퍼트의 이러한 철학적 통찰은 데릭 파피트(Derek Parfit)의 분석을 통해 구체화시킬 수 있다. 파피트는 불평등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는 목적론적 평등주의(Telic Egalitarianism)가 필연적으로 ‘하향 평준화 반론’(Levelling Down Objection)에 부딪힌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불평등의 완화 혹은 제거가 그 자체로 선이라면, 우리는 부유한 사람의 경제적 능력을 빈곤한 사람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모두가 똑같이 비참해지는 상황조차도 적어도 한 측면에서는 도덕적 개선이 이뤄졌다고 인정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파피트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맹인 예시’를 제시한다. 인구의 절반이 맹인인 세계에서 시력을 가진 나머지 절반의 눈을 멀게 한다면, 이는 신체적, 물리적 불평등을 완벽히 해소한 상태가 된다. 평등주의자들은 이러한 극단적인 결과를 두고 “평등이 달성되었으니 어떤 측면에서는 더 나은 상태”라고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맹인을 포함한 그 누구의 삶도 나아지지 않는 변화를 두고 ‘더 나은 상태’라고 말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더 좋지 않다면, 그 상황은 결코 더 나쁜 상황일 수 없다”는 우리의 도덕적 직관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Parfit 1997, pp. 210-211) 동일한 논리로 프랭크퍼트는 ‘10명의 환자와 5명분의 약’ 예시를 제시한다. 평등주의에 따라 약을 10명에게 똑같이 나누어주면 모두가 치사량에 미달하여 사망한다. 반면 5명에게 ‘충분한’ 양을 몰아주는 불평등 분배를 택하면 5명은 살릴 수 있다. (Frankfurt 2019) 이때 도덕적으로 올바른 선택은 명백히 후자다. 이는 ‘격차를 줄이는 것’보다 ‘임계점(threshold)을 넘기는 것’이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증명한다. 따라서 격차 그 자체가 도덕적 악이라는 평등주의의 전제는 기각되어야 하며, 분배 정의의 초점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각 개인의 절대적 상태로 이동해야 한다.
수사학적 평등과 도덕적 요구의 본질
그렇다면 분배 정의에서 개안이 분배를 요구할 권리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사회에 나의 몫을 요구할 권리, 즉 분배 정의에서 도덕적 청구권의 본질은 ‘타인과 같아질 권리’가 아닌 ‘자신의 필요를 충족할 권리’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프랭크퍼트는 “경제적 평등은 도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라고 선언하며 평등주의적 접근은 개인이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묻는 대신 “남이 무엇을 가졌는가?”에 집착하게 만들어 도덕적 시선을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돌리게 한다고 비판한다. 조셉 라즈(Joseph Raz)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평등이라는 관념이 실제로는 도덕적 무게가 없는 ‘수사학적(rhetorical) 표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라즈에 따르면, 권리의 본질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비교적(comparative)인 것이 아니라, 개별 주체의 속성 자체에서 도출되는 비-비교적(non-comparative)인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적 슬로건으로 많이 쓰이는 “모든 인간은 동등한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명제를 분석해 보자. 이 문장의 참뜻은 “인간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존중받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Being human is in itself sufficient ground for respect)”는 것이다. 여기서 ‘동등한(equal)’이라는 수식어를 제거해도 문장의 도덕적 구속력은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즉, 평등은 권리의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여진 수사에 불과할 뿐, 권리의 내용을 구성하는 독립적 가치가 아니다. (Raz 1986, pp. 228-229)
이러한 비-비교적 권리의 성격을 기아 문제와 같은 구체적 사안에 적용하면 평등주의의 논리적 취약함이 더욱 명확해진다. 빈곤에 기아에 시달리는 굶주린 사람에게 식량을 제공해야 하는 이유는 남들이 배불리 밥을 먹었으므로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함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향 평준화 반론’과 동일한 원리로, 모두가 굶주리는 상황에서는 사람들을 도울 의무조차 사라질 것이다. 라즈가 지적하듯이 우리가 굶주린 사람을 도와야 하는 이유, 또는 굶주린 사람이 식량을 요구할 권리는 그가 배고픔이라는 절대적인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타인의 상황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도덕적 의무-권리이다. 요컨대 동등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존중의 근거가 중요하다. 이는 프랭크퍼트가 강조한 자기 존중의 논리와도 맞닿아 있다. 분배를 요구할 나의 도덕적 권리와 존엄은 타인과 같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가진 고유한 특성과 필요에 의해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며, 분배의 원리 또한 비교적 권리에 기초한 평등주의가 아닌 비-비교적 원리에 근거한 충분성주의가 되어야 한다.
분배 정의 개입의 한계
마지막으로, 평등주의는 분배 정의가 개입하지 말아야 할 영역까지 개입해 자원을 낭비하고 도덕적 초점을 흐린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분배 정의는 사회 구성원의 행복이나 복지를 무한하게 증진시키거나 사회의 모든 가치와 재화를 분배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분배 정의의 개입은 사회 구성원들이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가치와 재화를 보장하는 선에서 멈춰야 한다.
행복이나 필요(needs)와 같은 가치는 무한히 축적되어야 할 도덕적 당위성을 지니지 않는다. 이러한 가치는 일정 수준에 도달해 기본적 수준을 충족시키면 더 이상의 증가가 의미를 잃는 ‘포화성’(satiability)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프랭크퍼트는 이를 “자신의 삶에 합리적으로 만족한다면 더 많은 것을 바랄 이유가 없다”는 ‘만족 논리’로 설명한다. (Frankfurt, 2019) 조셉 라즈는 이러한 관점을 ‘수확 체감의 원칙’으로 더 구체화해 옹호한다. 행복은 쾌락의 단순한 기계적 총합이 아니라 포화 가능한 삶의 질적 상태이므로, “행복한 사람에게 쾌락을 더해준다고 해서 그가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굶주린 사람에게 빵을 주는 행위는 도덕적 가치가 높지만, 이미 배가 부른 사람에게 빵을 더 주는 행위의 가치는 현저히 떨어진다. (Raz 1986, pp.242-243) 따라서 정의의 목료는 끝없는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각 사회 구성원이 포화점(충분선)에 도달하도록 돕는 것으로 국한되어야 하며, 그 이후의 격차는 도덕적으로 무의미해 분배 정의의 개입 범위로 볼 수 없다.
유사하게, ‘연민’(compassion)이라는 정의의 감정적 동력을 통해서도 충분성주의를 지지할 수 있다. 로저 크리스프(Roger Crisp)는 정의의 기반이 차가운 공정성이 아닌 고통에 대한 연민에 있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이 연민이 무한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크리스프는 “연민은 개인이 충분히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수준의 복지를 가질 때까지만 유효하다”라는 ‘충분성 원칙’을 내세운다. 예컨대 베벌리 힐스에 거주하는 10명의 초부자(Super-rich)와 10,000명의 부자 사이에 와인을 분배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평등주의 원칙에 따르면 두 집단 중 상대적으로 ‘덜 부유한’ 부자에게 와인 분배의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러한 수준에서 연민의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며 더 못한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는 논리 역시 힘을 잃는다. (Crisp 2003, pp.755-762) 이들은 이미 절대적인 충분선 위에 위치한 사람들이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격차는 고통을 수반하지 않으므로 연민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민은 임계점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만 도덕적 우선권을 부여할 뿐이다. 이는 절대적 충분성이 달성된 이후에는 정의의 의무가 종결되며, 더이상 격차를 문제삼는 것이 무의미함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평등주의는 이미 충분한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까지 문제 삼으며 분배 정의가 작동해야 할 유효 범위를 위반하고 있다. 정의로운 사회는 사회의 모든 가치와 재화가 평등하게 분배되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라즈의 ‘포화점’, 크리스프의 ‘충분선’, 또는 프랭크퍼트의 ‘절대적 수준’에 도달해 더 이상의 분배적 개입이 불필요해지는 사회일 것이다.
반론 - 협동의 공정성과 무관심 명제의 오류
물론 이러한 충분주의적 논증에 대해 여러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중 가장 강력한 반론은 평등주의의 논리적 파탄(하향 평준화)을 증명한다고 해서 곧바로 충분성주의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라는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의 반론일 것이다. 사회를 ‘상호 이익을 위한 협동 체제’로 규정하는 존 롤스(John Rawls)와 같은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충분성주의가 ‘절대적 수준 위에서의 무관심’이라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할 수 있다.
즉, 충분성주의의 핵심 전제인 ‘포화성’과 ‘수확 체감’이라는 원칙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개인이 생존하거나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자원에 한정될 뿐이다. 사회적 협동을 통해 산출된 ‘잉여 생산물’을 분배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특정한 공정성의 원칙이 요구된다. 롤스를 강력하게 옹호하며 충분성주의를 비판한 폴라 카살(Paula Casal)이 지적한 바와 같이, 만약 충분주의를 수용한다면 모든 구성원이 빈곤선을 넘은 풍요로운 사회에서 발생한 막대한 추가 이익을 독재자 한 명이 독식하든, 혹은 소수의 재벌이 독점하든, 정의의 관점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카살은 충분성주의를 두 가지 테제로 구분해 사람들이 결핍에서 우선 벗어나야 한다는 긍정적 테제의 타당성은 인정하지만, 일단 사람들이 절대적 수준에 도달하면 그 이상의 분배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는 부정적 테제는 심각한 도덕적 결함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Casal 2007, pp.297-300) 그는 특히 충분성주의의 풍요 논변, 즉 ‘부자와 초부자의 와인 분배 문제에 신경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만약 충분성주의를 수용한다면 모든 사람이 빈곤선을 넘은 사회에서 ‘진보적 조세’를 정당화할 근거가 사라진다. 만약 모든 아이들이 학교에 다녀 교육의 충분성이 달성된다면, 부유한 부모를 둔 아이가 더 많은 기회를 독점해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이 훼손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Casal 2007, p.311) 따라서 롤스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충분주의는 빈곤의 악을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빈곤선 위에서 사회적 협동의 산물을 나누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분배의 불공정성을 도덕적 무관심 속에 방치하고, 정의의 역할과 기능을 단지 고통의 제거라는 소극적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반박 - 공정성으로 위장한 시기심과 도덕적 초점의 유지
그러나 위와 같은 반론은 정의와 ‘바람직함’을 혼동한 주장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오류가 있다. 첫째, 롤스나 카살이 제기하는 ‘잉여 산출물의 공정한 분배’라는 요구는 엄밀히 따지면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선호의 영역이거나, 혹은 세련된 형태로 위장된 시기심(Envy)일 가능성이 높다. 프랭크퍼트의 논리대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합리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충분한 몫을 확보했다면, 그 위에서 발생하는 잉여를 누가 더 가져가는가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질이 훼손되어서가 아니라 단지 남이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을 배 아파하는 심리적 기제에 불과하다. 정의는 고통을 제거하고 권리를 보장해야 하지만, 시기심을 충족시켜 줄 의무는 없다. 만약 독재자의 독식이 문제라면, 그것은 그가 타인의 몫을 침해했거나(권리 침해), 정치적 자유를 억압했기(자유 침해) 때문이지, 단순히 부의 격차가 커서가 아니다. (Frankfurt, 2019)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억만장자의 추가적인 부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다. 만약 이를 진보적 조세나 기회 균등 원칙에 따라 제한한다면 그것은 사회적 효용이나 안정성을 위한 도구적 측면에서 제한되는 것이지, 정의의 필수 원칙에 따라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무관심 명제에 대한 비판은 정의의 도덕성의 초점을 흐리는 결과를 불러온다. 라즈가 지적했듯이 가치는 포화성을 지니기 때문에 절대적 수준 위에서의 분배 갈등은 빈곤선 아래의 고통에 비해 도덕적 긴급성 내지는 도덕적 우선순위가 현저히 떨어진다. 카살은 충분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공정성)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자원을 투입하자고 주장하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어야 할 주의와 자원을 분산시키게 된다. 충분주의가 임계점 위에서의 분배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도덕의 주된 시선이 ‘결핍의 제거’라는 가장 본질적인 과제에 집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카살이 예시로 든 부유층 자녀의 사례에서 진정한 문제는 부유층 자녀가 더 많은 기회를 갖는 것이 아니라, 빈곤층 자녀가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에 충분히 좋은 교육과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지점에 있다. 만약 모든 아이가 재능을 실현하기에 충분한 교육을 받는다면(절대적 충분성 달성), 그 위에서 일어나는 부모의 추가적 지원의 차이는 정의가 개입해야 할 영역이 아닌 가족의 자율적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롤스적 공정성을 근거로 충분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가장 시급한 도덕적 의무인 ‘빈곤의 종식’보다 덜 시급한 ‘부의 평준화’를 앞세우는 우선순위가 뒤집힌 주장이며, 충분성주의는 정의의 역할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정의가 관여할 분야에 엄격한 한계를 설정해 도덕적 초점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결론
지금까지 본론에서는 분배 정의의 목표를 평등이라는 상대적 가치에 두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음을 밝히고, 그 대안으로 절대적 수준의 충분성 확보를 제시했다. 데릭 파피트의 하향 평준화 반론을 통해 확인했듯이, 격차를 줄이는 것 그 자체는 누구의 삶도 개선하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에 본래적 선 즉 도덕과 정의의 목표가 될 될 수 없다. 또한 라즈와 프랭크퍼트의 분석을 통해, 사회 구성원이 분배를 요구할 권리는 타인과의 격차에서 오는 비교적 권리가 아닌, 기아와 질병, 결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절대적이고 비-비교적인 권리임을 확인해 평등주의적 분재 정의의 근거를 약화시켰다. 나아가 라즈의 포화성 개념과 크리스프의 연민 개념을 종합해 정의의 의무는 모든 구성원을 ‘충분한 수준(threshold)’ 위로 끌어올리는 시점에 종결됨을 논증하였다.
이와 같은 결론은 현대 사회의 분배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중요한 함의를 제공할 수 있다.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가 집중해야 할 지표는 지니 계수와 같은 상대적 불평등 지수가 아니라, 빈곤선 이하에 놓인 사람들의 절대적 복지 수준이어야 한다. 정책의 목표가 ‘부자의 부를 깎아내리는 것’에 맞춰질 때 사회는 시기심을 제도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지만, ‘빈자의 결핍을 채우는 것’에 맞춰질 때 비로소 인간의 존엄을 실현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충분주의적 결론이 무제한적인 부의 축적을 무비판적으로 옹호하거나, 극심한 불평등이 가져올 수 있는 정치적 부작용까지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본고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부작용을 통제하는 이유가 ‘평등이 좋아서’라는 분배 정의 차원의 이유가 아니라 ‘민주주의나 사회적 안정이 좋아서’라는 도구적 이유 때문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분배는 비교와 질투가 아닌, 각 개인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절대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에 국한되어야 한다. 결국 격차라는 허상에 매몰되지 않고 절대적 수준이라는 실재적 목표를 향할 때, 우리는 ‘각자가 충분하게 존엄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Frankfurt, Harry G. (2019). 평등은 없다 (안규남 역). 아날로그. (e-Book)
Parfit, Derek. (1997). “Equality and Priority.” Ratio, 10(3), 202-221.
Crisp, Roger. (2003). “Equality, Priority, and Compassion.” Ethics, 113(4), 745-763.
Raz, Joseph. (1986). The Morality of Freedom. Oxford University Press.
Casal, Paula. (2007). “Why Sufficiency Is Not Enough.” Ethics, 117(2), 296-326.
Rawls, John. (1971). A Theory of Justice. Harvard University Press.